‘甲’과 ‘乙’에 낀 영업직원은 괴로워

입력 2013-05-16 18:28


2000년 5월부터 크라운제과와 해태제과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A씨는 지난 3월 퇴직하면서 두 회사가 제기한 소송에 휘말렸다. 사측은 A씨가 10여년간 회사에 근무하는 동안 거래처에 물건을 임의로 싸게 넘겨 사측에 손해를 입혔다며 총 6429만원을 갚으라고 주장했다.

A씨의 입장은 다르다. 사측이 말하는 손해는 ‘비정상적인 판매 강요’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측은 달성 불가능한 판매 목표를 제시하고 끊임없이 영업직원을 압박했다는 것이다. A씨가 지난 2월 제시받은 판매 목표는 6500만원이었다. A씨는 이 목표액에 대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맞출 수 없는 금액”이라고 말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상사로부터 폭언과 욕설을 들어야 했다. 매일 목표달성 독촉 문자메시지가 A씨를 압박했다. 슈퍼마켓 같은 거래처들은 많은 물량을 받으려 하지 않았고, A씨는 제품을 싼값에 넘기거나 외상을 줘야 했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부족금’이 A씨의 장부에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A씨는 이런 비정상적인 판매방식이 업계의 관행이라고 말했다. 영업직원은 사측의 판매 압박에 ‘제살 깎아먹기’ 식의 영업을 하게 되고, 회사는 직원이 퇴직할 때 이 손해에 대한 책임을 묻는 방식이다. 영업직원으로 10년 정도 일하면 5000만원에서 억대의 부족금이 발생한다고 한다. 처음 채용될 때 ‘손해를 보전하겠다’는 일종의 각서를 쓰기 때문에 대부분의 직원들은 부족금을 물어주고 나간다. 제때 돈을 갚지 못할 경우에는 손해배상 소송을 건다. A씨는 “빚을 안 지고 나가는 영업직원을 본 적이 없다”며 “영업직원은 회사라는 ‘갑’과 거래처라는 ‘을’ 사이에 낀 ‘병’만도 못한 존재”라고 말했다.

A씨의 대리인인 법무법인 예율의 허윤 변호사는 “회사와 영업직원의 권력 관계에 따른 전형적인 판매 강요 방식”이라며 “모든 책임을 직원에게 전가하는 회사의 방침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반면, 해태제과 측은 “회사는 비정상적인 영업방식을 강요한 적이 없고, 직원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며 “소송을 취하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전국 각 법원에는 영업직원을 상대로 한 회사 측의 손해배상 소송이 자주 벌어진다. 법원은 통상적으로 영업직원의 책임을 40∼60%가량 묻고 있는 추세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0부는 지난해 10월 해태제과가 영업직원 박모씨 등 5명을 상대로 제기한 1억5000만원대 소송에서 “박씨 등은 약 9000만원을 회사에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우월한 회사의 지위를 동원해 형식적으로 작성된 각서의 효력은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직원들의 어려운 영업현실 등의 사유만으로 이를 전적으로 정당화해 손해배상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며 “손해의 공평한 부담이라는 견지에서 직원들의 책임을 손해의 60%로 제한한다”고 밝혔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