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고승욱] 731
입력 2013-05-16 19:09
‘1865’는 칠레 산페드로사가 만드는 와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아 연간 25만병이 넘게 팔린다. 그 인기에는 브랜드가 한몫한다. 산페드로사가 생산을 시작한 해를 기념한 이름이지만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18홀에 65타를 친다’고 해석하면서 지명도가 갑자기 높아졌다.
단순한 숫자에 역사적 사실이나 집단적 경험이 녹아들면서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 경우가 많다. 1492도 같은 경우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해인 1492년은 영화나 소설, 수많은 상품의 브랜드로 다시 태어났다. ‘에이리언’ ‘델마와 루이스’를 연출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1492 콜럼버스’ 역시 숫자에 담긴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라는 상징을 활용했다.
미국 애니메이션에는 A113이 종종 등장한다. ‘니모를 찾아서’에서는 잠수부가 들고 있는 카메라에 적혀 있고, ‘토이스토리’에는 자동차 번호판으로 나온다. ‘벅스라이프’에는 창고에 쌓인 상자의 일련번호로 슬쩍 얼굴을 내민다. A113은 월트디즈니재단이 1961년 설립한 캘리포니아예술대학의 강의실 번호다. 애니메이션 전공자들이 그래픽 디자인을 처음 배우는 곳이다. 이들이 졸업 후 작품을 만들면서 은근하게 소속감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이를 활용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담긴 숫자가 많다. 콜라 브랜드로 출시됐던 815는 광복과 독립을 상징한다. 휴대전화가 보급되기 전 삐삐를 사용했던 세대라면 8282(빨리빨리), 0404(영원히 사랑해), 1004(천사) 같은 숫자를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인텔사가 개발한 마이크로프로세서 80386에서 유래한 386은 특정 세대나 정치세력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쓰인다.
정치적 또는 종교적 상징으로 기능하는 숫자를 사용할 때는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4409가 그렇다. 이는 이라크전에서 사망한 미군 병사의 수다. 아라비아 숫자 3개의 단순한 조합이지만 반전(反戰) 단체들이 활용하면서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비판을 담는 상징이 됐다. 함부로 사용하다가는 ‘666’을 살짝 숨겨놓은 상표 디자인만큼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731이 쓰여진 훈련기에 탑승한 사진이 국제적 비난을 사고 있다. 731은 인류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전쟁범죄를 상징하는 숫자다. 이미 헌법 개정 의지를 담아 96이라는 등번호를 달고 야구장에 등장했기에 ‘우연의 일치’라는 주장은 억지 변명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사진을 본 일본 국민들이 왜 분노하지 않는지가 더 궁금하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