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창환 (7) 6·25 전쟁통에 아내 현수삼과 ‘3無’ 결혼식을

입력 2013-05-16 17:18


영국의 목사 출신 경제학자인 맬서스(Malthus)의 저서 ‘인구론’을 접한 건 평양신학교 시절 아버지 서재에서다. 일본어 번역본을 읽었는데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한국처럼 작은 영국이 인구팽창으로 수십년 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것. 방치할 경우, 영국 백성이 바다에 빠질 지경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30세 이후에 결혼하는 게 좋다는 그의 제안을 나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건 천정배필(天定配匹)을 만나는 일. 따라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이 나타날 때 내 자신의 계획이나 결심이 쉽게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당시 나는 서울 충무로에 있는 영락교회 여집사 댁에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하숙하는 한 신학생이 영락교회 성가대에서 함께 봉사하는 현수삼이라는 처녀를 소개해줬다. 명동 전주교회 부속 유치원 교사이고, 교회 성가대 부반주자라고 귀띔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현태룡 목사였다.

나는 아무 저항 없이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다. 영락교회를 찾아가 멀찌감치 서서 그녀를 바라본 적도 몇 번 있었다. ‘결혼하자.’ 마음을 정했다. 그 집에서는 ‘신학교 전임강사’인 나를 좋게 보고 결혼을 승낙했다. 1950년 5월 30일. 서울 동숭동에 있는 서울대 법대 교무처장 사택에서 박형용 한경직 목사 등 여러 목사님들의 축복 속에 약혼식을 가졌다. 약혼반지와 시계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돼 6·25 전쟁이 터졌다. 국군은 계속 남쪽으로 후퇴했다. 인민군은 집집마다 뒤져 남자들, 특히 청년들을 잡아갔다. 당시 나는 충무로 교회 집사님 댁에서 며칠 버티다가 약혼녀 부모님, 내 여동생(정연) 등과 함께 서울 명륜동 2층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약혼녀의 오빠(현수길)가 피난가면서 비워놓은 집이었다. 어느 날, 현 목사님은 약혼자인 수삼과 나를 불렀다.

“이 난리통에 생사를 같이해야 할 터이니, 결혼식을 치르는 게 좋겠네.”

1950년 8월 4일. 현 목사님은 결혼식을 위해 쇠고기 한 근을 얻어오셨다. 그리고 나서 목사님은 우리가 사는 임시거처에 식구들을 다 모아놓고 나와 수삼을 앉힌 뒤, 결혼식을 주례하셨다. 집밖에는 인민군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상황이라 찬송은 부르지 못하고 성경을 읽으신 후 축복기도로 결혼예식을 마무리하셨다. 나와 신부는 입던 옷을 그대로 입은 채였다. 결혼반지도, 예물 교환도, 신혼여행도 없는 ‘3무(無)’ 결혼식이었다.

1925년 황해도 은율 태생인 아내는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황해도 재령 명신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경기보육전문학교를 졸업한 재원(才媛)이었다. 활발하고 자유분방한 그의 성격은 나와 반대였다. 때때로 다투기도 했지만, 목사와 교수 부인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 대접하기를 즐겼고, 지도력도 있어서 유치원과 여전도회도 잘 이끌었다. 내가 장신대를 은퇴한 뒤로는 함께 외국으로 다녔다. 그 가운데 5년 정도 이어진 모스크바에서의 삶이 아내를 많이 힘들게 한 것 같다. 치매가 온 것이었다. 러시아 치안이 부실해 밖에 돌아다니기가 어려웠고, 언어소통도 원활하지 않다보니 생긴 증상 같았다.

미국에 돌아와 노인 아파트에서 사는 동안 심장병 수술을 한 뒤부터는 치매증상이 더 심해졌다. 그리고 병상에 누운 지 4개월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2007년 5월 29일이었다. 아내는 미시간주 트로이 화이트채플 공동묘지에 묻혔다. 열흘쯤 뒤면 아내 소천 6주기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나의 아내 현수삼이 그리워진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