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탐욕 때문에 피폐해져 가는 어린이

입력 2013-05-16 17:34


기업에 포위된 아이들/조엘 바칸/RHK

두 딸을 차에 태우고 가던 아버지가 딸들에게 묻는다. “학교는 어땠니?” 십대인 큰딸은 휴대전화 통화에 빠져 아버지가 뭘 물어본 줄도 모른다. 여덟 살 작은딸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헤드폰 음악에 맞춰 몸을 앞뒤로 흔든다. 대화를 단념한 아버지는 묵묵히 차를 몬다. 드니 아르캉의 영화 ‘무지의 시대’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이 책은 스마트폰 중독, 정서 장애 등 아이에게 나타나는 각종 문제를 다룬다. 그런데 이를 아이 자체의 문제가 아닌 유해 환경의 문제로, 그것도 기업들이 이익을 위해 마케팅한 환경이라는 관점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인터넷 게임에서 방수 재킷, 통조림 수프, 베이비 로션에 이르기까지 아이가 보고 듣고 만지고 먹는 모든 것의 유해성이 담겼다.

심지어 정신질환에까지 기업의 마케팅은 뻗친다. 주의력 결핍장애(ADD), 반항장애, 조울증 등 어린이 정신질환 진단은 1980년대 들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질병을 진단하는 기술이 정교해진 요인도 있겠지만, 제약업계가 의료행위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졌다는 사실은 간과돼 왔다. 저자는 지난 30년간 영향력을 키운 제약회사가 어떠한 방식으로 소아 정신장애의 범위와 종류를 확대하고, 정신치료제의 장점을 선전하고, 약물의 위험한 부작용을 경시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어린이 시장은 기업에 아주 매력적이다. 관련 산업 시장 규모는 1980년 50억 달러, 1990년 500억 달러에서 현재 1조 달러로 가파

르게 늘고 있다.

저자는 이 같은 산업 성장 속도와 관련해 신자유주의를 주목한다. 1980년 이래 시장의 자유가 공공의 규제를 압도하면서 어린이 보호를 실행하는 관습이나 제도들은 철폐되다시피 했다. 결과적으로 만만한 소비자인 아이들은 거대 기업의 영향권 안에 놓인 것이다.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되기도 한다. 2006년 미국 미니애폴리스의 네 살배기 자넬 브라운이 복통을 호소하며 병원에 입원했다가 나흘 만에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의사는 처음에 위장염을 의심해 아이의 위에 들었던 ‘리복’ 상표가 새겨진 작은 펜던트를 눈치 채지 못하고 지나쳤다. 리복 운동화를 사면 기념품으로 주는 이 펜던트는 납 함량이 무려 99%였다. 미국 연방법은 어린이 장신구의 납 함량을 0.06%로 제한한다. 자넬의 사인은 납중독이었다. 이 사건으로 리복은 공개사과와 함께 중국산 펜던트 30만개 회수조치를 취했으며 벌금 100만 달러를 지불했다.

지난 수십 년 사이 점점 더 많은 종류의 화학물질에 노출되면서 아이들의 만성질환이 크게 증가했다. 미국에서 어린이 천식 발병률은 50%, 어린이 뇌종양은 40% 증가했다. 2005년 미국에서 행해진 일가족 대상 화학물질 실험 결과, 한 살짜리 아기의 몸에서는 부모의 몸에서보다 7배 많은 화학물질이 검출됐다.

저자인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조엘 바칸 교수는 거대 기업들이 어떤 전략으로 아이들을 매수하는지, 그로 인해 우리의 미래는 얼마나 피폐해질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어린이 산업에 있어서는 사후 조치에 입각한 현재의 규제제도에서 한 발 나아가 사전예방을 전제로 하는 법적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상 대책에서 대규모 피해가 예상되는 재난에 대해서는 예보를 해 사전 대피를 시키듯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취지에 동참해달라는 초청서다. 이창신 옮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