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표면에 일렁이는 실패에 관한 명상… 황병승 시집 ‘육체쇼와 전집’

입력 2013-05-16 17:43


하위문화의 거칠고 생생한 시적 에너지를 이용해 고급문화를 기습해온 시인 황병승(43·사진)의 시 세계는 하나의 독법을 거부한다. 어떤 식으로 읽든 그 독법은 빗나가고 만다. 그가 6년 만에 낸 세 번째 시집 ‘육체쇼와 전집’(문학과지성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실패를 무릅쓰고 이번 시집을 ‘실패에 관한 명상’이라고 몰아가본다.

하지만 실패가 시적 주제라는 게 말이 되는가. 공교롭게도 말이 된다. 실패는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향한 노력이 좌절됐을 때 나타나는 결과이다. 목표가 없다면 실패도 없다는 측면에서 실패는 우리 삶의 표면에서 늘 일렁이는 현상인 것이다.

“오빠, 저기 봐, 하늘에 ‘1’이라고 쓰여 있어, 차창을 가리키던 어린 동생의 모습…/ 바보 같은 소리, 하늘에 1이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니라 그건 차창에 붙어 있는 번호다, 퉁명스럽게 말하던 아버지의 모습… 그는 이어서 열심히 하면 된다, 라고 뜬금없이 말했는데 아마도 혼자만의 머릿속에서 ‘1등’을 떠올렸나 보다.”(‘벌거벗은 포도송이’ 부분)

‘열심히 하면 된다’라는 준엄한 아버지의 충고는 시적 화자의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는다. 한데 마지막 연에서 이 충고는 철저히 거부당한다. “이 모든 게 기계의 커터 속으로 사라질 쓸모없는 잔디와 같다고 생각하면서….” 마지막 연은 열심히 해도 결국 ‘사라질 쓸모없는 잔디’처럼 틀림없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의 회한이자 회한의 기침인 것이다. 다른 시를 읽어본다.

“저는 누구입니까 이 육체와 전집은 누구의 것입니까/ 저는 근육이 없습니다 톱니가 없어요/ 잠잘 때 코에서 죽은 사슴 냄새가 나는 여자의 아들입니다/ 뭐가,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중얼거리다, 라는 말에 문제가 있습니까.”(‘육체쇼와 전집’ 부분)

이 시의 화자는 병상에 오랫동안 누워 있는 환자이다. 근육을 움직일 수 없는 병에 걸려 누워있을 때 ‘뭐가 잘못된 것일까’라고 한탄하며 자신을 책망하는 환자 역시 실패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시집의 맨 마지막 시는 아예 실패에 대해 쓰고 있다.

“나는 보여주고자 하였지요, 다양한 각도에서의 실패를, 독자들은 보았을까, 내가 보여주고자 한 실패. 보지 못했지… 나는 결국 실패를 보여주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쓸모없는 독자들이여,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내일은 프로’ 부분)

황병승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나의 실패’인데 그걸 보여주는 것조차 실패했으니 시집은 고스란히 ‘실패’에게 바쳐지고 있다. 여기엔 21세기에 들어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더욱 실패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문명 비판적 시각이 개입돼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