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박강섭] 아이디어 사고팔자

입력 2013-05-15 19:01


싸이가 ‘젠틀맨’을 공개하기 전 ‘시건방춤’을 만든 안무팀에 저작권료를 지불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안무는 음악처럼 저작권이 인정되지 않아 리메이크를 해도 저작권을 구입할 필요가 없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미래창조과학부 업무보고에서 “남의 창의력을 인정하는 자세야말로 콘텐츠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모범적인 사례”라고 극찬하면서 “소프트웨어나 콘텐츠의 가치를 인정하고 지원을 확대하고 공정한 시장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창조경제의 요체”라고 말했다.

몇 해 전 100만원이 넘는 포토샵을 구입한 적이 있다. 판매점을 찾아가 이런저런 상담을 하던 중 구매자의 직업이 기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판매자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개인과 기업은 물론 공공기관까지 포토샵을 불법으로 다운받아 쓰는데 기자가 개인적으로 비싼 포토샵을 구입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소프트웨어를 구매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세태가 그렇지 않다 보니 그날 특별할인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사회 전반적으로 아이디어나 표현물 등 소프트웨어에 대한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이지만 관광업계의 저작권 침해는 도를 넘는다. 한 여행사가 적지 않은 자금과 시간을 투자해 독특한 관광상품을 개발하면 며칠 만에 같거나 유사한 여행상품이 몇 천원 더 싸게 시장에 나오고 소비자들은 이를 선택한다. 먼저 여행상품을 개발한 업체만 투자비를 날리다 보니 이젠 누구도 새로운 여행상품을 개발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관광상품의 저작권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규정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있다고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작권 침해는 공공기관인 지방자치단체도 예외가 아니다. 이웃 지자체의 축제를 그대로 베끼거나 살짝 변경하는 사례는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남의 아이디어를 훔치거나 베끼는 행위가 벤치마킹이라는 가면을 쓰고 정당화되고 있지만 이 역시 규제할 법적 수단은 없다. 서울시와 진주시의 경우처럼 심지어 덩치 큰 지자체가 작은 지자체의 아이디어를 베낀 후 더 많은 자금을 투입해 더 호화롭게 판을 벌리는 경우도 있다.

진주시는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지정된 ‘진주남강유등축제’가 ‘서울 등축제’ 때문에 관광객을 빼앗기고 있다며 지난 3월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한 후 서울시에 등축제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1947년 이래 66년 동안 계속되어온 유등축제가 ‘서울 등축제’ 때문에 피해가 막심하다는 주장이다. 비대위는 “진주의 고유하고 독창적인 남강유등축제를 계속 모방하는 서울시는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비난공세를 펴고 있지만 서울시는 “등축제가 진주만의 고유 행사가 아니어서 중단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그동안 유등축제에 공을 들여온 진주시로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지만 서울시의 양심에 호소하는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관광분야에 짝퉁상품과 짝퉁축제가 유달리 많은 이유는 법적인 규제가 어려운 탓도 있지만 업계가 영세하고 아이디어에 대해 저작권료를 지불하는 풍토가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방미 마지막 날인 지난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게티박물관에서 열린 ‘한·미 창조경제 리더 간담회’에서 “아이디어가 보상받는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번 기회에 관계당국은 관광분야의 참신한 아이디어 개발과 저작권 보호를 위한 제도 개선에 아이디어를 모아야 한다. ‘아이디어 시장’을 만들어 관광상품이나 축제에 대한 일반인의 아이디어를 오픈마켓에 등록하고 업체나 지자체가 소정의 저작권료를 내고 사용하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정당한 사용료를 내고 ‘아이디어 시장’의 아이디어를 구입한 개인이나 단체에 배타적 독점권을 보장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