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염성덕] 우리 선생님

입력 2013-05-15 19:00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으로 백발의 노신사가 들어섰다. 50대 남자들이 황급히 일어나 노신사를 반갑게 맞았다. 식탁 중앙에 좌정한 노신사가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50대들이 연이어 도착했다. 이들은 노신사에게 넙죽넙죽 큰절을 올렸다. 노신사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50대들을 반겼다.

춘천고를 졸업한 지 올해로 35년째인 제자들이 스승의 날(15일)을 앞두고 고3 때 담임인 이봉구 선생님을 모시고 반창회를 열었다. 청와대에서 주요 보직을 맡은 동기와 언론사에서 전무로 승진한 친구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서울에서 생활하는 동기 대부분이 참석했다. 올해 희수(喜壽)를 맞은 선생님은 머리가 하얗게 세었지만 악수하는 손에는 힘이 넘쳤다.

제자들은 두 해 전에도 강남에서 선생님을 모신 적이 있다. 이 선생님은 그때 일을 두고두고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제자들이 잊지 않고 불러줘 정말 고맙다. 주변의 친지들에게 너희들 자랑을 많이 한다. 특히 교사 출신인 친구들이 굉장히 부러워한다.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하지만 사회에서 기틀을 잡은 제자들이 초대하는 자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선생님은 낼모레면 은퇴할 나이가 된 제자들에게 당부한다. “너희들도 얼마 있지 않으면 직장에서 은퇴할 만큼 나이를 먹었구나. 너희들보다 한 세대 먼저 은퇴하고 소일거리를 찾아보았다. 붓글씨도 배우고, 시에서 운영하는 문화교실에도 가고, 국내외 여행도 다니고…. 여러 가지를 해보았는데 가장 좋은 소일거리는 텃밭을 가꾸는 것이었다.”

이 선생님이 텃밭을 경작하게 된 사연은 이채롭다. 경기도 김포에 사는 선생님은 농작물을 재배할 땅이 없었다. 한 건설회사가 관리하는 대지의 모퉁이를 빌려 농사를 짓고 있단다. 공사를 재개하면 언제든지 갈아엎겠다고 현장 소장을 설득했단다. 고구마 감자 참깨를 기르고 수확해 자녀와 이웃에게 나눠주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적당히 노동하면서 건강을 유지하게 된 것은 경작이 주는 덤이었다.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농작물이 쑥쑥 자란다는 말을 실감한다고 했다.

이 선생님이 밝힌 생활신조는 기억할 만하다. “학생이 있어야 선생도 있고 학교도 있다. 나는 평생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이 땅의 교사들이 이 선생님처럼 제자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학교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의 태반은 해결될 것이다. 한 번 선생님은 영원한 선생님이다. 동기들은 그날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