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창환 (6) 공부하러 배타고 南으로… 5년간 4개 신학교 ‘섭렵’

입력 2013-05-15 17:27


1946년 늦가을이었다. 가방에 옷 몇 벌과 성경책, 영어 사전을 넣었다. 아버지 서재에 있던 헬라어 포켓 성경도 챙겼다. 그리고 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불타산을 넘어 해안(태탄)에 정박해 있던 조그마한 어선에 몸을 실었다.

손을 흔들어주시는 아버지를 보며 생각했다. ‘공부 마치고 돌아와서 아버지 밑에 부목사가 되겠습니다. 기다려주세요.’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존경하던 아버지와 마지막 이별 장면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옹진에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마포에서 내렸다.

먼저 찾아간 곳은 1940년에 설립된 조선신학교(한신대의 전신). 아버지와 숭실대 동기였던 한경직 목사님의 추천서를 통해 조선신학교 2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3년여 동안 나는 한국교회 신학교 태동의 격변기를 몸소 체험했다. 당시 신학노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나로서는 한국교회의 신학 문제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조선신학교 편입 1년여 만에 고려신학교(고신대의 전신)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진보와 보수로 갈린 신학노선 갈등으로 빚어진 이른바 ‘신앙동지회’ 사건이 터지면서 내린 결정이었다. 박형용 박사가 1947년 9월 만주 봉천에서 귀국,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나를 포함한 신앙동지회 회원들이 대거 고려신학교로 편입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학교운영을 둘러싼 내부노선 갈등은 이어졌다.

급기야 교장인 박 박사가 취임 9개월 만에 사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사태는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결국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는 계기가 됐다. 1948년 6월 폐허가 된 서울 남산 조선신궁의 부속 건물에서 평양신학교의 전통 계승을 표방하는 장로회신학교가 생겼다.

나는 이 학교에 편입했다. 평양신학교와 조선신학교, 고려신학교를 거쳐 장로회신학교까지 5년여 만에 4개 신학교를 다녀본 셈이다. 그해 7월 9일에는 장로회신학교의 역사적인 1회 졸업식이 열렸다. 25명의 졸업생 중에 나도 포함됐다.

졸업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다른 동료들과 달리 나는 막막했다.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나의 길을 하나님 뜻대로 인도해주세요.” 그래서 걱정은 하지 않았다. 졸업식을 며칠 앞둔 날, 방과 후에 교장이셨던 박형용 박사님과 둘이서 청파동 사택을 향해 남산을 내려오던 중이었다. 박사님이 말을 건네셨다.

“박군은 졸업 후에 어디 갈 데가 있는가?” “없습니다.” 박사님은 조금 뜸을 들이시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신학교에서 가르쳐볼 생각 없는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인지라 어안이 벙벙했다.

“제가 무얼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어학을 가르쳐보면 어때?”

“그러지요.” 나는 무슨 생각으로 자신 있게 대답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1948년 9월 학기부터 모교의 어학 전임강사가 됐다. 그때 시작한 일이 일생을 신학교 교수로서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 줄이야.

신학교 교사(校舍)는 남산의 조선신궁 앞뜰 오른쪽에 ‘ㄱ’자로 된 일본식 다다미방이었다. 히브리어, 헬라어, 영어를 가르쳤다. 학생들은 방바닥에 앉아서 수업을 들었다.

당시 내 나이는 스물넷을 갓 넘었을 때였다. 결혼 적령기 때라 내 여동생(정연)을 통해 청혼하는 이들이 간혹 있었다. 하지만 서른 살이 되기 전에는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을 해놓은 터라 이성에게 한눈을 팔진 않았다. 만혼(晩婚)을 결심한 건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