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창환 (5) 일본군 징집 한달 만에 8·15 광복 ‘무사 귀환’
입력 2013-05-14 17:26
평양신학교 예과 1학년 과목 중에 헬라어 수업이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진도를 잘 따라가지 못하는 바람에 수업이 중단됐다. 그 과목이 재미있었던 나로서는 아쉬웠다.
그 후 어느 날인가 아버지 서가에서 헬라어 교과서를 우연히 발견하면서 나의 헬라어 공부 불씨는 다시 이어졌다. 당시 황해도 겸이포에서 평양까지 약 1시간정도 기차를 타고 통학했는데, 헬라어 연습문제를 푸는 데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때부터 마주한 헬라어 성경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의 매일 나의 하루를 열고 닫는 친구가 되고 있다.
대동아전쟁은 점점 일본에게 불리한 국면으로 흐르고 있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은 한국교회에 박해의 끈을 조이기 시작했다. 교단을 강제로 합치는가 하면 교회 문을 닫게 했다. 아버지도 겸이포 중앙교회에서 밀려나셨다.
1945년 4월 6일. 사복형사 두 명이 아버지를 체포해 갔다. 아버지가 주도해서 황주군 일대 목사들과 함께 반국가 음모를 꾸몄다는 허무맹랑한 이유였다. 아버지는 잠을 안 재우는 고문 등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다. 하루는 아버지를 뵈러 헌병대에 갔는데, 헌병대 사람이 나를 아무런 이유 없이 일주일 감금시켰다. 그러고선 죄목을 씌워 내보내야 하기에 나의 혐의를 따졌다. 취조관이 물었다. “너는 집에서 국어(일본말)를 상용했느냐?” “아니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일주일 구금은 결국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은 죗값인 셈이었다.
일본 수병으로 징집되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아버지 면회를 청했다. 만에 하나 내가 전쟁 통에 전사라도 한다면 이번이 마지막 면회일 수도 있었다. 일본 헌병 입회하에 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슬쩍 옆을 보니 우리 부자(父子)를 지켜보던 일본 헌병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점령지 백성의 억울한 운명에 대한 동정이었는지, 그저 부자 사이의 불우한 작별이 가여워서인지 알 길은 없었지만.
나의 일본 수병 생활도 길지 않았다. 입대한 지 한달 보름 만에 해방을 맞았다. 그 짧은 기간 중에서도 잊지 못할 기억이 하나 있다. 하루는 부대원 전체가 어디론가 이동 중이었다. 그런데 일본인 훈련관들이 나에 대해 쑥덕대는 소리를 들었다.
“고노 야쯔와 니게소다노니 니게나이노요(요놈은 도망갈 것 같은데 도망을 안 간단 말이야).”
그들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나중에 한국인 훈련관에게 전해 들었다. 입대할 때 일본어와 산수 시험을 쳤는데 둘 다 만점을 받은 사람이 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관들이 나를 요주의 인물로 감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8·15 해방과 함께 무사히 귀가했다. 평양형무소에 수감돼 계시던 아버지도 해방과 함께 석방되어 있었다. 온 가족이 다시 모인 건 하나님의 은혜였다. 다시 평양신학교에 갔지만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어수선했다. 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남한으로 이주하거나 탈출한 상태였다. 나는 본과 2학년을 시작하다가 교수진도 약하고 교통문제도 있어서 학교 나가는 것을 멈췄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목회하시는 황해도 장연읍에 머물며 그 지방 단기 성경학교에서 가르쳤다. 이어 몇몇 동기들과 중학교를 세우고, 영어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1946년 늦가을의 어느 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서울에는 좋은 신학교가 생겼다고 하더라. 거기에 박형용 박사 같은 훌륭한 교수들이 있다고 하더라. 서울에 가는 게 좋겠다.”(당시 박형용 박사는 만주에서 귀국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즉각 행동으로 옮겼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