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박재순 농어촌공사 사장 “제2 새마을운동으로 농업의 새 동력 창출해야”
입력 2013-05-14 17:47
올해로 창립 105주년을 맞는 한국농어촌공사는 농어민의 벗으로 통한다. 농어민을 위한 저수지 축조는 물론 토지를 담보로 연금을 주기도 하는 금융기관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전에 경북 경주시의 저수지가 무너져 관심을 끌기도 했다. 경기 의왕에 자리 잡은 공사는 내년 8월이면 혁신도시인 전남 나주로 떠난다. 취임 1년을 넘긴 박재순 사장을 만나 공사의 과거와 미래를 물었다. 박 사장은 새마을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오늘날의 농촌을 있게 한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농촌 새마을 운동의 정신을 되찾아 농업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헌신하겠다”고 말했다. 새 정부의 국정과제인 식량안보를 달성하기 위해 해외 농업개발 분야의 첨병 역할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과 함께. 말단 공무원인 9급에서 출발해 정상의 자리에 오른 사람답게 매사에 신중함이 몸에 밴 듯 시종 조심스럽게 인터뷰에 응했다.
만난 사람=박병권 논설위원
-지난 1년 동안 공사를 이끌며 가장 보람이 컸던 것은 무엇이었나.
“민간인 통제 구역 내에 있는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한 보를 설치하는데 작업 때마다 군병력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기에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예산을 집중 투입해 내년에 완공예정인 것을 2년 앞당겼다. 현지에 가서 살펴본 결과 해답을 찾은 경우였다.”
-현장에 많이 다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현장에 가야 주민들의 어려움을 알 수 있고 그들과 소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상에 앉아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 것도 현장을 둘러보면 답이 나온다. 가령, 충남 당진의 간척지 임대의 경우 농민들에게 1년의 단기간을 임대했더니 농사가 망하면 만회할 대책이 없다고 하소연해서 임대기간을 3년으로 늘렸더니 농민들의 불만이 단번에 해소됐다. 또 땅에 맞지도 않은 작목을 관에서 지정하던 제도도 과감하게 바꿔 농민들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개선했다.”
-경북 경주시 안강의 산대 저수지 둑이 무너져 곤혹스럽지 않았나.
“당일 보고받자 바로 KTX열차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가 주변 농민들의 집을 직접 찾아가 피해를 물어보고 바로 대책을 지시했다. 지금 공사가 관리하는 저수지 가운데 노후화된 것이 3172곳인데 과학적인 탐사를 통해 오는 10월까지 모두 보수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관리하는 저수지보다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는 소규모 저수지가 더 위험하다. 지자체와 협의하고 관련 규정을 바꿔 지자체가 관리하던 저수지도 모두 우리가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려고 한다.”
-농어촌의 양극화 해소와 사회안전망 구축이 시급한 현안이라고 생각하는데.
“소득절벽에 처한 고령 농민들에게 농지를 담보로 노후생활안전자금을 매월 연금방식으로 지원하는 농지연금사업과 고령은퇴, 이농, 전업희망 농가의 농지를 매입해 비축한 뒤 젊은 세대나 귀농자 등에게 농지를 임대하고 있다. 또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와 부채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농가의 농지를 매입하고, 이 매입 대금으로 부채를 갚게 함으로써 부채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경영회생지원 농지매입 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FTA 등 개방화에 대비하기 위해 1.5㏊ 규모의 과수전업농 2만4000호를 육성하는 과원 규모화사업도 추진 중이다.”
-젊은이들이 사라진 농어촌에 활력을 불어 넣을 방법은 없나.
“농어촌 인구비율은 지난 2000년 20.3%에서 2010년에는 18.0%로 해마다 낮아져 고령화에 따른 인적자원 부족 현상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농어촌 자체적으로 해결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어 농어촌 마을의 부족한 면을 보강하고, 침체된 분위기를 일신해 주민 스스로 역량을 결집해 마을의 발전을 선도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스마일 재능뱅크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재능기부자와 농어촌마을을 연결시켜 조화를 이루게 하고, 도시민과 농어촌마을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 특유의 정이란 게 있는데, 바로 이 나눔의 정서를 통해 앞으로도 많은 도시민들이 농어촌에 대한 재능기부활동에 적극 참여해 다함께 잘사는 행복한 농어촌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함께하는 우리농촌운동이 과거 새마을운동처럼 농촌의 새로운 활력창출을 위한 범국민운동으로 승화되었으면 한다. 지금 도시에 살고 있는 국민들도 어릴 적 모두 농어촌에서 생활한 경우가 많아 국민적 호응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우리의 농업분야 기술을 해외에 수출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지난해에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추진하는 총 공사비 2억5000만 달러의 까리안댐 건설 사업 중 690만 달러의 공사감리 계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 대홍수로 큰 피해를 입은 태국 정부가 12조4000억원을 투입해 수립 중인 통합물관리사업의 10개 사업구간에서 예비후보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었다.
-새만금 간척사업의 추진 경과와 향후 개발계획은.
“2010년 세계에서 가장 긴 새만금 방조제 준공 후 농업용지조성, 방조제 명소화, 산업단지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간척지의 약 30%에 달하는 8570㏊의 농업용지 개발사업은 올 하반기 5공구 공사를 시작으로 2020년까지 완료할 계획이다. 산업단지조성 사업도 향후 분양 전망이 매우 밝다. 초기 부담 최소화, 공모요건 완화, 인센티브 제공 등 민간투자자의 관심을 증대시켜 성공적 사업 추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국내 유수의 대기업에서 많은 관심을 기울여줬으면 좋겠다.”
-농촌에 산재해 있는 다문화 가정을 위해서는 하는 일이 없나.
“농어업인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인 만큼 단순한 기부행위나 사회공헌활동을 뛰어넘는 고품질 서비스 제공으로 농어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특히 다문화 가정은 전국적으로 30만 가구가 넘고, 이들 대부분이 농어촌에서 생활하고 있다. 공사에서는 2008년부터 다문화가정의 모국 방문과 노후 주택수리 등 다양한 지원 활동을 해오고 있다. 특히 지난해 10월 31일에는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다문화부부 20쌍을 초청해 농어촌공사 대운동장에서 합동결혼식을 올렸으며, 이들 부부가 행복한 삶을 설계할 수 있도록 2박3일 일정으로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보내드렸다. 영농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이들 가정에 컴퓨터와 노트북을 보내주는 사업도 벌이고 있다.”
인터뷰를 가진 지난 8일은 어버이날이었다. 마침 인터뷰 직전에 박 사장의 트위터에 어버이날을 맞아 모범적인 효행을 실천한 직원을 표창했다는 글이 올라왔기에 전말을 상세히 물어봤다. 박 사장은 농어촌공사에서는 20년 전 당시 김영진 사장이 부인상을 당해 받은 부의금을 종잣돈으로 삼아 해마다 어버이날에 2명의 모범 사원에게 효행상을 준다고 소개했다. 올해 상을 받은 직원은 치매인 아버지와 걷지도 못하는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있는 경기도 평택의 6급직원인 소모씨라고 한다.
-내년에 본사를 이곳 의왕에서 나주로 옮길 경우 직원들이 불만이 많을 텐데요.
“그런 것 전혀 없습니다. 나주는 배의 주산지로 전형적인 농촌인데 오히려 잘됐지요. 농민들 가운데서 생활하게 됐으니. 직원들이 고생하는데 제대로 복지대책을 세워주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농어민을 위해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명감에 함부로 복지 얘기하기도 어렵습니다. 아무튼 전남도와 잘 협조하기 위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공직생활과 삶에서의 각오나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고건 전 총리님과 가끔 만나 가르침을 받습니다. 공무원은 돈 받지 않고 청렴할 것과 줄서지 말 것 그리고 술 먹었다는 소리 듣지 말 것을 강조하시더군요. 그 말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걷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간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농어촌공사는 지금 도약의 시험대에 놓여 있다. 무엇보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과제인 식량안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농지확보를 통해 농업개발의 일꾼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 사장은 40년 넘는 공직생활 경험으로 쉽지 않은 과제를 무난히 해결할 것이라고 자부하며 말을 끝냈다.
의왕=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
■ 박재순 사장은
박재순 사장은 옛 공무원 말단인 9급 출신으로 공사 사장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전남 보성이 고향인 박 사장은 광역시가 되기 전인 광주시에서 공직에 첫발을 디뎠다. 1964년이었다.
그는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행정고시 출신 엘리트를 따라잡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했다고 털어놨다. 행시 출신들은 이론에 강하지만 현장에는 약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현장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또 지휘관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시계획관과 공보관을 거쳐야 한다는 점도 깨달았다고 했다.
이 두 자리를 거쳐야 앞으로 도시의 발전 방향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런 다음 법령을 철저하게 외워 머릿속에 저장했다. 어차피 행정이란 법에 따라 집행되는 것이라 규정을 모르면 행정행위 자체가 성립될 수 없기에 밤을 새워서라도 규정집을 외웠다고 한다.
이런 노력으로 그는 관선 군수를 거쳐 최고의 자리에 못지않은 공사 사장직에 올랐다. 전남에서는 노무현 정부 시절 9급 공무원에서 출발해 인사수석에 오른 김완기 전 수석과 함께 9급 공무원의 전설로 통한다.
△1944년(전남 보성) △조선대 정치외교학과 △조선대 정치학 박사 △전남 강진군수 △전남 기획관리실장 △2011년 10월∼ 한국농어촌공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