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창환 (4) “목사 돼라” 거부할 수 없는 아버지의 편지

입력 2013-05-13 17:26


‘우리는 목사 집안이다. 너는 대를 이어 목사가 되어야 한다. 가족회의에서 결정했다.’

아버지가 보내신 편지 내용의 요지다. 한마디로 수긍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수줍음이 많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가 무섭고, 말까지 서툴렀다. 어느 면으로 보나 목사가 될 소질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답장을 써서 보냈다. ‘아버지 저는 목사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어머니가 다시 편지를 보내오셨다.

‘얘야, 목사 일을 사람의 힘으로 하는 줄 아느냐.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되는 것인데, 네가 못한다고 하면 되겠느냐.’ 책망하는 어조였다. 어머니의 말씀은 거역하기 힘들었다. 그때부터 생각을 고쳐먹기 시작했다.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힘을 주신다’는 말에 조금 위안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뒤부터는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어떤 목사가 되어야 할까.’

가장 먼저 영향을 끼친 분은 오산장로교회 박기환 목사님이었다. 신령하신 분이자 설교도 잘하시는 분이었다. 다만 음치(音癡)라는 게 옥에티였다. 찬송가 선창을 못하셔서 찬송가를 펴면 교인들이 먼저 큰소리로 음을 잡아주곤 했다. 박 목사님을 보면서 나는 ‘적어도 음악을 아는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결심은 결국 일본 도쿄로 음악공부를 가고 싶은 마음으로까지 이어졌다. 앞서 나는 오산학교 브라스밴드 멤버로 트럼펫, 바이올린에 이어 피아노와 작곡까지 배웠다. 이런 경험까지 이어져 도쿄제국음악학교 작곡과 지망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오산학교 시절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하나 있다. 당시 학교에서는 매일 정기적으로 나팔 신호가 울렸다. 오전 6시(기상), 오후 7시(저녁공부시간), 오후 10시(취침시간) 등 3차례였는데, 그 나팔수가 바로 나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시간에 맞춰 학교 앞 언덕에 올라가서 나팔 부는 일을 3년간 도맡았다. 이 공로로 나는 졸업식 때 개근상에다 봉사상, 우등상까지 받았다. 바쁜 농촌 일손을 멈추고 황해도 시골에서 맏손자 졸업식을 보기 위해 찾아오신 친할아버지께서는 무척 흐뭇해 하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에 유학, 도쿄제국음악학교 작곡과에 입학했다. 유명한 작곡가로 이름을 날린 나운영 선생과 우리나라 1세대 첼리스트 전봉초 선생 등이 졸업반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도쿄의 초봄은 습기 탓인지 차고 을씨년스러웠지만 도쿄 구경도 하고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 유학생활은 몇 달도 가지 못했다.

대동아전쟁 때였던 당시 미국이 도쿄를 공습하면서 일본이 밀리던 때였다. 일본은 즉각 징병령을 내렸다. 한국인 갑자(甲子)생부터였다. 내가 딱 걸렸다. ‘아, 이제 일본군으로 끌려가는구나. 끌려갈 때 가더라도 집에 가서 부모님이랑 같이 지내다 가야겠다.’ 이렇게 해서 나의 일본유학은 반년도 안 돼 끝나고 말았다.

귀국하니 아버지는 황해도 겸이포 중앙교회 담임목사로 계셨다. 나의 징병검사 결과는 갑종 합격이었다. 일본 수병으로 배정됐다. 징집 때까지 남은 기간은 약 2년. 아버지의 권유로 평양신학교 예과 2학년에 입학했다. 본과에 입학할 연령이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가 1943년 4월이었다. 입학은 했지만 공부하는 날은 많지 않았다. 근로봉사라는 명목으로 포탄을 만들고, 비행장을 청소하고, 심지어 소금까지 구웠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은 나날을 보낼 수 있는 흥밋거리를 하나 찾았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