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창환 (3) 여덟살 무렵 우물 속으로 추락… ‘거듭남’ 체험
입력 2013-05-12 16:57
여덟 살 무렵, 사리원으로 이사를 하면서 덕성보통학교를 다니게 됐다. 황해도 신천 경신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사리원 덕성보통학교 교장으로 발령이 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 때문인지 친구가 별로 없었다. 어울리는 친구라고는 앞집에 사는 오응식(당시 사리원서부교회 담임) 목사님 아들 기성이와 기준이 정도였다. 다른 취미라면 사리원 남단 경암산에 오르거나 여동생이랑 놀아주기, 어머니 집안일 돕기 정도였다.
처음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그 즈음이다. 하루는 집 뒷마당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릴 때였다. 물이 가득 담긴 두레박 무게를 못 이겨 내가 그만 우물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우물 안에서 허우적거리다 정신을 차리니 덜컥 겁이 났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우물을 둘러싸고 있는 돌 벽 틈새에 발을 디디고 서서 핏줄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와 동네 아낙네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담 벽에 걸린 두레박줄을 내려줬다. 나는 줄을 움켜쥐었다. 위에서는 서서히 줄을 잡아당겨 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우지직.’ 잡고 있던 두레박줄이 끊어지면서 다시 물속에 처박혔다. 줄이 낡아 삭은 상태였던 것이다. 결국 나를 구해주신 분은 교우 심방을 마치고 귀가하시던 앞집의 오 목사님이셨다. 우물 안까지 들어와 내 손을 덥석 잡고 끌어내셨다.
2년 뒤에는 아버지가 진남포 득신학교 교장으로 옮기시면서 한 번 더 이사했다. 내가 그 당시 진남포를 잊을 수 없는 건 내 신앙의 기념비적인 장소였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중생(거듭남) 체험을 했다.
어느 날인가 길선주 목사의 부흥회가 억량리 교회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그 교회 담임은 김성택 목사였는데,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매부이자 장로교총회 총회장을 지내신 분이다. 당시 부흥회에서 길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을 강해하셨다. 일주일 정도 이어진 말씀 집회에서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말씀의 은혜를 깊이 맛봤다.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그때가 내 나이 열두 살이었다.
이듬해 졸업을 하고 평양고등보통학교와 숭인상업학교 두 곳에 입학시험을 치렀지만 보기 좋게 낙방했다. 일본어 시험성적이 낮았던 것 같다. 재수를 해서 이듬해 같은 학교에 시험을 쳤는데 또 떨어졌다. 할 수 없이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지원, 입학시험을 쳤다. 다른 동급생 8명이 함께 치렀는데 여기서는 나만 붙고 다른 이들은 모두 낙방했다. 오산학교에 붙으면서 나는 집을 떠나 생활하게 됐다. 비슷한 시기, 아버지는 교장 직을 관두고 평양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하셨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오산학교 시절, 일제는 한글을 말살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당시 오산학교 교사였던 함석헌 선생은 수신(修身) 과목 시간에 일본어 교과서를 들고 들어오셨지만, 수업 내내 우리말로 가르치셨던 기억이 또렷하다. 주일이 되면 동네외곽에 있는 장로교회에 출석했다.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성가대 멤버가 되어 교장 선생님의 사모님(남강 이승훈 선생의 딸), 또 다른 선생님 사모님들과 함께 찬양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당시 일제는 한국인의 출세 길을 꽉 막아 놓았다. 나는 공과(工科)나 의과 계통으로 공부를 해야 밥벌이가 될 것 같아서 서울 공업전문학교(서울대 공대 전신)를 목표로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보낸 편지 한통이 도착했다. 그 편지가 내 인생을 바꿔놓을 줄은 몰랐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