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에이전트 “선수권익 위해 도입 필요” VS “시장 영세… 아직은 이르다”
입력 2013-05-12 17:35
박찬호, 김병현, 추신수, 류현진, 윤석민.
이들 뛰어난 야구선수 5명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에이전트가 스캇 보라스(61)라는 점이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에이전트로 꼽히는 그는 지난 3월 미국 스포츠전문지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가 선정한 ‘스포츠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 50명’ 가운데 23위에 올랐다. 스포츠 에이전트로는 그가 유일하다.
야구 전문 에이전시 보라스 코퍼레이션을 이끌고 있는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액 계약’ 기록을 연거푸 갈아치운 것으로 유명하다. 1997년 그레그 매덕스의 5년간 5750만 달러로 신기록을 세운 보라스는 이듬해 케빈 브라운을 LA 다저스와 계약시키며 1억500만 달러를 받아내 사상 최초 총액 1억 달러 이상 계약을 성사시켰다. 이후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텍사스로 이적하면서 받은 10년간 2억5200만 달러에 계약한 것을 비롯해 수많은 대형 계약을 성사시켰다.
그가 한국에도 잘 알려진 것은 한국인 메이저리거들에게 대박 연봉 계약을 성사시켜줬기 때문이다. 그는 2002년 FA(자유계약선수)가 된 박찬호의 에이전트를 맡아 텍사스와 5년 650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했으며, 올 시즌 류현진과 LA 다저스의 연봉 협상에서 6년 3600만 달러를 이끌어냈다. 최근 신시내티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추신수 역시 올 시즌을 끝으로 FA가 되는 만큼 그가 천문학적인 계약을 이끌어낼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그리고 윤석민 역시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경우 좋은 조건의 계약을 맺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출신 메이저리거들의 연봉 계약이 언론에 소개되면서 국내 야구계에서도 에이전트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에이전트는 선수를 대신해 연봉 협상과 광고 출연 계약을 처리하는 등 포괄적인 대리권을 갖고 구단과 협상을 진행하는 일을 한다. 하지만 국내에선 프로 종목 가운데 축구만 유일하게 에이전트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을 뿐 야구를 비롯해 농구, 배구 등에선 에이전트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국내 최고 인기스포츠인 프로야구의 경우 KBO 규약에는 에이전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2001년 ‘선수와 구단의 대면계약에서 대리인의 참여를 인정하지 않는 규약은 불공정조항으로 시정해야 한다’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정권고를 받아들여 제30조에 ‘선수가 대리인을 통해 계약을 체결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한다’는 내용을 넣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약 부칙 제172조에 ‘규약 제30조의 대리인 제도는 한국 프로야구의 여건과 일본 프로야구의 변호사 대리인 제도 시행 결과 등 제반 사항을 고려해 시행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사실상 에이전트 제도를 도입하지 않고 있다.
야구계에서 에이전트의 도입 필요성과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지난 2010년 시즌이 끝난 뒤 당시 롯데의 간판타자였던 이대호와 롯데의 연봉계약 분쟁이다. 당시 타격 7관왕을 기록한 이대호는 2011년도 연봉으로 2010년보다 3억1000만원이 오른 7억원을 달라고 구단에 요청했지만 구단은 6억3000만원을 제시했다. 그리고 KBO 연봉조정위원회 결과 구단이 제시한 연봉이 적정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당시 야구계에서는 이대호가 에이전트 없이 혼자 준비하다보니 구단에 비해 제대로 자료를 준비하지 못했다는 동정 여론이 나오기도 했다. 결국 이대호는 이듬해 FA 자격을 얻자마자 일본 오릭스와 2년간 7억엔을 받고 떠나 버렸다.
프로야구에서 에이전트 제도의 시행이 10여년째 보류되고 있는 것은 구단들의 반대 때문이다. 모기업의 지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구단들은 국내 프로야구 시장이 너무 영세한 만큼 에이전트 도입으로 인한 연봉 상승으로 경영 압박을 초래할 것으로 우려한다. 류대환 KBO 홍보부장은 “구단들이 마케팅을 통해 대부분 흑자를 기록한 메이저리그와 달리 우리나라는 홍보효과를 위해 모기업이 지원하는 돈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에이전트 도입은 국내 스포츠 시장이 좀 더 활성화된 이후 순차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프로야구선수협회 등 선수들을 중심으로 에이전트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프로야구 선수 103명을 대상을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7.3%(90명)가 에이전트 제도의 시행에 찬성했다. 구단에 비해 상대적 약자인 선수들의 노동계약상 권리를 보호하면서 구단과의 직접 대면에 의한 감정 대립을 예방하기 위해서가 주된 이유였다. 그리고 전문가에 의한 적절한 연봉액을 산출하기 위한 것과 일본 프로야구의 변호사 대리인 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된 것도 찬성의 이유로 꼽혔다.
지난 6일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에서 서울지방변호사회 주최로 열린 ‘스포츠 선수 인권 개선을 위한 심포지엄’은 매년 되풀이되는 야구선수와 구단과의 연봉협상 과정의 불공정성 등 법률적 문제를 제기해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신지혜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정규 학교 교육 현장에서 배제돼 엘리트 체육교육을 받아온 프로야구 선수들이 길고 복잡한 프로야구 규약과 선수 계약 내용을 정확히 이해해 대처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며 “선수들의 기본적 인권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현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계약체결 시 대리인제도는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심포지엄 이후 구단과 선수의 관계를 최근 한국 사회를 강타한 ‘갑을 관계’의 프레임으로 분석한 기사까지 잇따라 나오고 있다.
이제 에이전트 제도가 프로야구를 비롯해 스포츠산업 분야에서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프로야구에서 에이전트 도입을 둘러싸고 이해 당사자인 구단과 선수는 물론 법조계 등 제반 분야에서 머리를 맞대고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스포츠 에이전트
선수를 대신해 연봉 협상이나 신규 입단, 다른 구단으로의 이적 등 업무를 대행해 주는 전문가. 선수 훈련 프로그램을 짜주고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포괄적인 매니지먼트로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대개 선수 수입의 5∼10%를 수수료로 받는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