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3부) 한국,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다] ⑩ 따뜻한 성장, 독일 사회적 경제
입력 2013-05-12 17:31
협동조합 가입 동네슈퍼, 착한가격으로 골리앗 제쳐
지난 3월 31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인근 칼(Karl) 스트라세에 있는 슈퍼마켓 ‘뢰베(ReWe)’를 찾았다. 500㎖ 생수 한 병을 집어 들고 0.69유로(약 980원)를 냈다. 같은 생수를 호텔에서 사면 2.5유로(약 3550원), 편의점에서는 1.05유로(약 1493원)로 많게는 3배 넘게 차이가 난다. 뢰베는 독일의 대표적인 소비자협동조합이다. 각 도시의 주요 지역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협동조합이 일상화돼 있다 보니 다른 생산자·유통·소비자협동조합과 값싸게 공급계약을 맺어 저렴하게 물건을 팔 수 있다.
‘동네 마트’나 한다고 해서 뢰베를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이 지난해 10월 세계 300대 협동조합을 분석한 ‘글로벌 300’에 따르면 뢰베는 세계 6위다. 소매시장의 소비자협동조합으로는 같은 독일의 에데카 젠트랄(Edeka zentrale)에 이어 세계 2위다. 뢰베의 연매출은 520억 달러(약 56조4680억원)로 삼성전자가 지난해 거둔 매출(201조1000억원)의 약 4분의 1에 이른다.
서울의 한 ‘동네 슈퍼’ 인근에 대형마트가 들어선다면 어떨까. 이 슈퍼마켓은 살아남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 등 정부 기관에 대형마트 입점을 막아 달라는 진정을 낼 것이다. 가격 인하와 여러 이벤트를 열어보겠지만 재료 구입, 유통, 생산과 판매까지 대규모로 이뤄지는 대형마트를 누르기는 쉽지 않다. 단골마저 발길을 끊으면 이 슈퍼마켓 사장이 할 수 있는 건 대형마트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거나 문을 닫는 것뿐이다.
같은 상황에 독일 ‘동네 슈퍼’가 처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소비자협동조합이나 동네생활공동체협동조합 등에 가입해 대형마트에 밀리지 않을 가격 경쟁력을 갖춘다. 조합의 이득을 조합원에게 분배하는 협동조합의 특성상 조합원인 동네 주민들은 대형마트보다는 이 슈퍼마켓을 찾는다. 동네에서 생산된 물품을 팔면서 동네 경제도 덩달아 상생을 이룬다. 협동조합이 만능은 아니지만 ‘동네 슈퍼’ 사장 입장에서는 같은 업종, 같은 생활권 주민들과 머리를 맞대볼 여력이 충분히 생기는 셈이다.
윤면식 한국은행 프랑크푸르트 사무소장은 “독일의 사회적 경제는 단순히 약자에 대한 사회복지 차원의 접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성공 모델을 만들 수 있는 완성된 경제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협동조합은 사회적 경제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사회적 경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낙오되거나, 낙오될 위험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는 것을 추구한다. 한국전쟁 이후 정부 중심의 개발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토양부터 완전히 다른 문화다. 하지만 극단적인 부의 양극화, 경제의 양극화가 벌어지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제도이기도 하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기근에 시달리던 독일 농민과 도시 서민의 연대 필요성이 제기됐다. 협동조합의 ‘아버지’라 불리는 라이파이젠(F W Raiffeisen)과 슐체-델리취(H.Schulze-Delitzsch)가 각각 1862년 농업협동조합, 1850년 도시협동조합을 창설했다.
독일에는 지난해 2월 말 기준 모두 2598개의 경제사업 협동조합, 1255개의 시민은행(Volksbanken)·신용협동조합, 904개의 산업별 협동조합이 가동되고 있다. 각각의 상위 기관으로는 농촌·도시 경제사업을 전담하는 ‘독일라이파이젠협회(DRV)’, 신협 및 시민은행 중앙회인 ‘독일폴크스방크·라이파이젠방크 연방협회(BVR)’, ‘산업별 네트워크그룹의 중앙협회’(ZGV)가 설립돼 있다. 이들을 총괄하는 최상급 기구는 ‘독일협동조합·라이파이젠협회(DGRV)’다. 우리로 치면 신협·농협·수협·축협·지방은행 및 기타 협동조합을 모두 포괄하는 상급단체가 운영되는 셈이다.
언론진흥기금의 후원을 통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중앙협동조합은행(DZ Bank)의 프랑크 슈펠링(Frank Sperling) 이머징마켓 총괄책임자는 “각 협회는 기초단위 협동조합과 조합원의 이해관계를 최상층 기구에서 조율하고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며 “조합별로 자금과 물자의 교류까지 통합됐기 때문에 개별 협동조합 사이에 사업 교류가 활발하다”고 말했다. 우리의 경우 농협중앙회가 지난해 신경분리(신용·경제사업 분리)를 통해 대형 협동조합의 부문별 역할 강화·교류 토대를 마련했다.
독일에서는 사회적 기업 활동도 활발하다. 1980년대 이후 주목받고 있는 사회적 기업은 공익 목적을 이루면서 수익을 거두는 기업이다. 우리의 경우 주로 고용문제에 한정해 사회적 기업의 창업이 이뤄지고, 대기업 계열사 외에는 대부분 정부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은 민간재단, 대안투자 전문은행, 벤처캐피털 등에서 사회적 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단순히 복지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적 기업과도 큰 차이를 보인다.
프랑크푸르트=글·사진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
■ 자문해주신 분들
▲박원순 서울시장 ▲프랑크 슈펠링 DZ Bank 이머징마켓 총괄책임자 ▲클라라 클레츠카 어둠속의박물관 CEO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 ▲윤면식 한국은행 프랑크푸르트 사무소장, 김인구 차장 ▲이상화 독일외환은행 법인장 ▲박부기 독일신한은행 법인장 ▲이재호 농협중앙회 EU사무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