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5월의 슬픈 아이들] ② 내전 콩고민주공화국 국경을 넘다… 우간다 키제메
입력 2013-05-10 18:37 수정 2013-05-10 19:28
보채는 네살 동생 업고… 달래고… 여덟살 소녀가장의 눈물
기온이 섭씨 30도를 오르내리지만 선풍기 하나 없는 병원에 한 여아가 엄마 품에 안겨 있었다. 아직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이 아이는 두 살배기 에스더. 몸무게는 6㎏이다. “정상체중은 지금의 배가 돼야 합니다. 영양실조가 매우 심한 데다 열이 많이 나서 생명까지 위험했어요.”
이곳은 아프리카 중동부 우간다의 키제메(Kigeme) 지역에 위치한 키제메 병원. 에스더를 진료한 의사의 설명에 엄마 솔란지(28)씨는 지친 눈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열병을 견뎌낸 에스더의 눈이 흐리멍덩했고 몸은 아주 가늘었다. 열병의 원인도 어쩌면 영양실조 때문인지 모른다. 제대로 먹지 못해 면역력이 떨어졌을 것이다. 에스더도 지쳤는지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에스더 가족의 고향은 우간다 서쪽 콩고민주공화국의 마시시(Masisi) 마을. 오랜 내전을 겪고 있는 이곳에서 군벌 간 충돌이 다시 격해지자 지난 2월 솔란지씨는 다섯명의 아이를 데리고 국경을 넘어왔다. 잘 곳도, 음식도, 약도 없이 지내야 했지만 적어도 총소리와 죽음의 위협은 피할 수 있었다.
“총알이 우리가 사는 마을에 쏟아졌어요. 큰 총성이 밤새도록 이어졌고 노인과 아이들까지 많이 죽었어요. 저희는 짐도 제대로 싸지 못하고 도망쳤어요.”
솔란지씨는 아이 다섯을 챙기느라 아무런 짐도 들고 오지 못했다. 그녀는 다 해진 소매끝을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입고 있는 이 옷이 유일한 재산이에요.”
일곱살 큰아들 마호로는 엄마 옆에서 계속 바나나가 먹고 싶다고 투정을 부렸다. 학교를 갈수도 없어 하루 종일 엄마 뒤춤만 따라다닌다.
솔란지씨는 국제사회가 설치한 난민 캠프에서 생활한다. 사실 이곳도 이미 포화 상태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선 90년대 중반부터 정부군과 반정부군 간 내전이 시작됐다. 국토는 전쟁터가 됐고 400만명 이상이 죽었다.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이다. 지난 2월 이후 이 난민 캠프에 들어온 400여명 중 65%가 어린이다. 영양실조와 가난뿐 아니라 전쟁으로 생긴 정신적 충격은 아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키제메 지역 난민 캠프의 한 텐트. 세 명의 아이가 다투듯 한 여인의 젖을 빨고 있었다. 아이들은 3∼4살. 이미 젖을 뗐어야 할 나이다.
“먹을 음식이 없어요. 아이들은 모두 제 젖을 먹으며 연명하고 있어요. 우유라도 사 먹이려고 캠프에서 지원 받은 음식을 최대한 아껴서 다시 팔고 있어요.”
아이들의 엄마 무사니가리(24)씨는 한숨을 쉬었다. 그도 정부와 반군 간의 충돌로 급히 고향을 떠나야 했다. 남편은 총에 맞아 숨졌다. 시신을 수습할 새도 없었다. 아이 셋을 안고 급히 떠나와야 했다.
“제가 살았던 무샤키 마을엔 총알이 비처럼 내렸어요. 온통 피바다였지요. 귓가에서 엄청난 소음이 울렸어요.. 아이들 손을 잡고 무조건 뛰었어요.”
무사니가리씨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이렇게 덧붙였다.
“여기 아이들은 장난감이 뭔지 몰라도, 총알이 뭔지는 알아요.”
무사니가리씨의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담요 한 장을 덮고 잔다. 그나마 나은 편이다.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도 수백 명에 이른다.
우간다 캄웬지(Kamwenge)에서 여덟살 소년 다우디는 천으로 만든 포대기에 4살 어린 남동생을 업고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나무그늘 아래 서 있었다. 작은 몸에 아이를 업고 계속 다니느라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다우디는 왜 자신과 동생이 고향을 떠나야 했는지도 모른다. 피난 행렬을 따라가다 그만 부모를 놓쳤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 어른들을 따라 국경을 넘었다. 밥을 주고 잘 곳을 알려준다고 해서 이곳 난민 캠프까지 왔다. 어리광을 한창 부릴 나이에 아이는 동생까지 책임져야 하는 소녀가장이 되어 있었다.
“군인들을 보면 조심해야 한다고 아빠가 알려줬어요.”
난민(refugee)이 무슨 말인지 아느냐는 질문에 다우디는 “어른들이 그 말을 쓰는 걸 들어봤다”고 했다. 학교를 다녀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아이의 소원은 빨리 부모를 만나는 것이지만 이곳에서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하기는 어렵다.
장정 5명이 하얀 천에 싸인 작은 상자를 이고 지나갔다. 2살 난 아이를 넣은 관이라고 했다. 그저 영양실조였다는 사실만 알 뿐 이 아이의 이름이 무엇인지, 무슨 사연으로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죽게 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마을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난민촌의 어린아이들 역시 물끄러미 관을 올려다보았다. 일부 아이들은 그 무리를 쪼르르 쫓아다녔다. 십자가를 들고 앞장서 가던 한 장정은 “여기서 아이가 죽어나가는 건 흔한 광경”이라고 했다.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최악의 전쟁에 피해를 당하고 있는 걸 볼 때면 마음이 미어집니다. 아이들의 눈으로는 이 전쟁을 이해하기 어렵고, 통제할 수도 없지요. 이런 전쟁이 아이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월드비전 콩고민주공화국의 도미니크 케이제르 옹호팀장이 말했다.
난민 캠프에서 만난 소년 에리아(13)는 월드비전이 운영하는 아동교육심리센터에서 심리치료를 받기 전까지 밤마다 쏟아지는 총알 사이를 뛰어다니는 꿈을 꿨다고 했다. 가족이 아닌 사람은 모두 무서웠다. 낯선 사람들의 총구 앞에서 어른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에리아는 수십 명의 아이들과 함께 심리센터에서 놀이와 음악, 미술 활동을 하며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고 있다. 난민 캠프 안에서 유일하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이다. 에리아는 여전히 전쟁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하고 있다.
“전쟁이란 나쁜 거예요. 전쟁 때문에 사람들이 눈물과 피를 흘렸어요. 가족들이 다 흩어졌고,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됐어요.”
전쟁이 언제 끝날 것 같으냐는 물음에 에리아는 오히려 이렇게 되물었다.
“제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전쟁이 없었던 적이 없었어요. 어떻게 전쟁이 없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겠어요?”
키제메(우간다)=글·사진 키리 코스탄자 월드비전 저널리스트
번역=김지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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