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 맞은 서울예고] 60년 한국 예술의 요람… 그들이 오늘도 꿈꾸는 건 ‘넘버원’
입력 2013-05-11 04:03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 전문 중등교육기관인 서울예술고등학교가 올해 개교 60주년을 맞았다. 서울예고는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출범한 이래 우리나라 예술계 주요 인사들을 대거 배출해 왔다. 지휘자 금난새, 첼리스트 정명화, 윤성주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등이 모두 이곳에서 꿈을 키웠다.
◇피란촌 막사에서 시작된 꿈=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전쟁도 막바지로 치닫는 듯했던 1953년 3월. 서울예고는 부산 영도의 허름한 막사에서 문을 열었다.
당시 우리나라 예술교육 기관은 서울대와 이화여대뿐이었다. 계속된 전쟁으로 온 국민이 절망한 상황에서 고등학교 예술교육은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일본 동북제국대학 출신인 신봉조(1900∼92) 이화여고 교장은 예술교육이 필수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하얼빈 교향악단 부지휘자로 활동하던 임원식(1919∼2002) 교감의 의지가 합해져 비로소 서울예고가 탄생했다.
개교 당시 이름은 이화예술고등학교였다. 피란촌에 세워진 이화여고 임시교사 옆에 군용 천막을 쳐 수업 공간을 마련해 놓고 신문에 신입생 모집 광고를 냈다. 그러나 예술인을 ‘풍각쟁이’ 정도로 치부하던 당시 분위기와 전쟁 혼란기가 겹쳐 지원자는 많지 않았다. 1기 입학생은 미술과 4명, 음악과 9명 등 13명이 전부였다.
학생들은 흙바닥에서 식당용 탁자를 두고 간이 의자에 앉아 공부를 했다. 천막은 비가 오면 물이 샜고, 여름이면 찜통 같은 더위에 시달렸다. 그러나 교사들과 학생들의 예술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개교 첫해 학교 근처의 경찰 마구간을 빌려 연 미술전과 이듬해 서울 화신백화점에서 개최한 전시회는 국내외에서 유례 없는 호평을 받았다.
1953년 7월 전쟁이 끝난 뒤 서울 정동 이화여고의 교실 한 개를 빌려 가까스로 학교 구색을 갖췄다. 서울예고로 이름을 바꾼 것도 이때다. 1956년 첫 졸업생들이 쟁쟁한 대학에 연이어 합격하면서 비로소 서울예고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평창동 교사로는 1976년에 옮겼다.
◇한국 예술의 요람으로 성장하다=지난 60년간 1만6633명이 서울예고를 졸업했다. 무용 2150명, 미술 5880명, 음악 8603명 등이다.
‘한국 무용의 대모’로 불리는 유학자 교수는 무용부 1회 졸업생이다. 현대무용가 차진엽과 조주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박인자 전 국립발레단 단장과 문일지 전 서울시립무용단 단장도 이곳에서 무용을 배웠다.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된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양혜규를 비롯해 서양화가 박항률 교수, 조각가 박충흠 등도 서울예고의 이름을 빛낸 미술인들이다. 지난 2월 타계한 고 이두식 화백도 한국 추상회화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젊은 피’들의 활약도 눈부시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지난 2월 세계적 권위의 비올라 콩쿠르인 유리바슈메트 국제 콩쿠르에서 대회 역사상 단 한 번도 수여되지 않았던 대상을 타낸 비올리스트 이화윤도 2학년생이다.
2008년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축가를 부른 테너 정의근도 서울예고 출신이다. 이 밖에 서울대 김영률 음대 학장, 피아니스트 김대진·이경숙,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백주영, 소프라노 김영미·서예리 등도 이 학교에서 기량을 갈고 닦았다. 가수 송창식은 서울예고를 입학했으나 성악과를 중퇴했다.
◇위기 이겨내고 새로운 60년 꿈꾼다=부침 없이 성장하는 것 같던 서울예고에도 위기가 닥쳤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재단 이화예술학원의 재정난이 심각해졌다. 이어 2006년 전 교장이 학교발전기금을 빼돌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편입학 비리도 적발됐다. 2009년 서울시교육청은 서울예고 이사 전원을 해임했다. 학교는 폐지론까지 나올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에 몰렸다.
그러나 2010년 참빛그룹 이대봉 회장이 재단을 인수해 서울예술학원으로 다시 출범하면서 서울예고에도 새로운 희망이 열렸다. 이제 서울예고는 예술의 산업화로 좁아진 순수예술의 입지를 다시 구축해나가는 데 역량을 쏟고 있다.
오는 27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는 ‘서울예고 개교 60주년 기념 음악회’가 개최된다. 지휘자 금난새와 한국 실내악계 거장 김민 악장이 이끄는 서울예고 동문 오케스트라, 바이올리니스트 윤소영, 테너 정의근이 협연한다. 18일부터 26일까지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1∼54회 졸업생 370명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이는 미술 전시회도 열린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