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외국인 CEO들] 벽안의 우리 사장님 못말리는 한국사랑
입력 2013-05-11 04:05
지난 2일 한국베링거인겔하임은 취임 1주년을 맞은 더크 밴 니커크 사장에게 특별한 선물을 했다. 바로 ‘반덕호(潘德好)’라는 한국 이름이다. 영문 이름에서 따온 ‘반(Van)’이라는 성에 ’덕(德)이 있는 호(好)인’이라는 뜻을 붙였다. 작명 과정도 특별했다. 직원들은 남아공 출신인 밴 니커크 사장을 위해 이름을 공모했고, 사원 280명 중에 60명이 응모한 후보작 중 15개를 추린 후 전 직원 투표로 최종 이름을 낙점했다.
밴니커크 사장은 감사의 뜻으로 직원들을 자택으로 초대했고, 직원들은 이날 사장 자택 대문에 한글 이름을 새긴 문패를 달았다.
국내 20대 그룹의 외국인 임원 중 최고위직 인사는 제임스 비모스키 ㈜두산 부회장이다. 비모스키 부회장은 외국인 임원이 극히 드물던 2006년 두산에 합류해 어느새 8년차를 맞은 장수 CEO이기도 하다.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 서울 지사장으로 1992년부터 한국과 인연을 맺어 우리 경제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상당한 ‘한국통’이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비모스키 부회장은 공연과 음식, 명소 등 한국의 다양한 면모를 즐겨 최근에는 정동극장의 전통 뮤지컬 ‘미소’를 5번 넘게 본 것으로 알고 있다”며 “매운 한국 음식도 가리지 않고, 휴가 때면 여수나 완도, 담양, 춘천 등 전국 각지를 두루 여행한다”고 전했다.
한국스탠다드차타드금융그룹 회장 겸 SC은행장인 리차드 힐 회장은 발군의 우리말 실력을 자랑한다. 외부 인사들을 만나면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낼 정도다. 5개국어를 구사할 만큼 언어에 재능이 있기도 하지만, 부임 초기 부인과 함께 일주일에 세 번씩 한국어 개인교습을 빼먹지 않았다는 노력파이기도 하다. 덕분에 지난해 1월 SC제일은행이 SC은행으로 이름을 바꾸는 브랜드 선포식과 같은 해 10월 전국 직원가족들을 초청한 자선모금 겸 노사화합 한마당 행사에서 우리말로 각각 5분, 10분이 넘는 연설을 실수 없이 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SC은행 관계자는 “원고를 모두 외워 연설하기 때문에 1분짜리 스피치를 위해 1시간 이상 연습한다”며 “말하는 건 아직도 어려워하지만 한국생활 6년째이다 보니 듣고 이해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사우디아라비아 태생인 에쓰오일의 나세르 알 마하셔 대표이사 역시 한국사랑으로 유명하다. 우리 명절과 연말연시에 잿빛 두루마기나 진홍색 마고자를 입고 나타나는가 하면 명함에 ‘나세일’이라는 한국 이름을 넣었다. 알 마하셔 대표는 부임 후 전용차를 도요타 렉서스에서 국산인 현대차 에쿠스로 바꿨고, 휴대전화도 애플 아이폰에서 삼성 갤럭시로 교체했다. 에쓰오일 관계자는 “한국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며 “김치나 한국음식도 즐겨 먹는 편”이라고 전했다.
CEO가 아닌 ‘CDO’라는 조금 낯선 직함을 단 외국인도 있다. 올해 1월 현대·기아차 디자인담당 사장으로 승진하며 현대차그룹에서 첫 외국인 사장 자리에 오른 피터 슈라이어 최고디자인책임자(Chief Design Officer) 이야기다.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는 슈라이어 사장은 2006년 당시 기아차 사장이던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이 직접 유럽으로 날아가 영입에 공을 들였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슈라이어 사장은 “한국의 전통과 역사를 디자인에 접목시키고 싶다”고 자주 의견을 밝혀왔고, 호랑이를 콘셉트로 한 ‘호랑이 코 그릴’로 K시리즈 등 기아차의 앞태를 장식했다.
삼성과 LG그룹의 경우 의외로 본사에서 활약하는 외국인 경영진이 많지 않다. 두 그룹 모두 부사장이 외국인 최고위직으로 삼성전자에는 팀 백스터 부사장이, LG전자에는 짐 클레이튼 부사장이 있다. 미국 출신인 두 사람은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각사에서 ‘최초’와 ‘유일’ 기록을 세우며 나란히 승진했다.
LG전자는 이전 남용 부회장 시절 외국인 부사장들이 있었지만 현재는 클레이튼 부사장이 유일한 외국인 부사장이다. 카우보이의 고장 텍사스에서 공부했지만 뚝심 있고 묵직한 업무 스타일은 딱 ‘경상도 남자’라는 평이다. 삼성전자 북미총괄 미국법인장인 팀 백스터 부사장은 외국인 최초의 삼성전자 부사장이지만 줄곧 미국 현지에서 근무해 한국에서 일한 경험은 없다.
이들 외에도 SK그룹에는 SK바이오팜의 크리스토퍼 갤런과 SK차이나의 쑨쯔창 등 두 명의 외국인 CEO가 있다. 한화케미칼에는 폴 콜만 최고운영책임자(COO·Chief Operating Officer)가 있다.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와 한국IBM은 여성 외국인 CEO가 회사를 이끌고 있다. 지난 3월 부임한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의 브리타 제에거 대표는 수입차 업계의 첫 외국인 여성 CEO다. 세쌍둥이 엄마인 제에거 대표는 아이들과 함께 한국으로 이삿짐을 챙겨왔다. 그는 “CEO에게 성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면서도 자신의 활동이 한국의 젊은 여성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좋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IBM의 셜리 위 추이 대표는 서울이 고향인 중국계 미국인이다. 화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혜숙 기자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