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한연희] 고아는 이제 헐벗고 배고프지 않아요 따뜻한 엄마 품이 그립답니다
입력 2013-05-10 17:33 수정 2013-05-10 17:34
한국입양홍보회 한연희 이사
“제가 하나님과 아이들에게 죄송하고 부끄러운 것은 흔쾌히 (입양을) 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장애아동 2명을 포함, 7남2녀를 입양한 한연희(56·여) 한국입양홍보회 이사는 19년간 꾸준히 아이를 입양해온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라고.
입양을 위해 결혼한 지 2년 만에 불임 수술을 받았고, 양육비를 벌기 위해 과외·학원강사 등을 전전했으며 10자녀 뒷바라지에 노후자금을 모두 쏟아부었다. 또 가정 없는 아이들이 부모를 만나도록 14년간 공개입양운동을 벌였으며 입양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전국 초등학생과 청소년에게 ‘반편견’ 입양 강의를 해 왔다. 이 모든 것은 한 이사가 입양한 자녀를 위해 그의 결혼생활 32년 동안 해온 일이다. 이렇듯 반평생을 입양에 헌신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그의 대답은 더 뜻밖으로 들린다.
하지만 한 이사가 자신의 입양 동기를 이렇게 답한 까닭은 따로 있다. 더 많은 아이를 가정에서 기꺼이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따른 것. 부모 없는 아이에 대한 관심과 입양을 대하는 그의 자세는 동정심이 아니다. 일종의 사명감에 가깝다. ‘입양의 날’(5월 11일)을 앞둔 지난 3일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한국입양홍보회 사무실에서 만난 한 이사는 인터뷰 내내 활기차게 답했으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 아이들의 만남을 설명할 때면 눈시울을 붉히며 목이 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를 보기만 하면 마음이 미어지는 고통이 밀려와 견딜 수 없어요. 그럼에도 입양에 앞서 늘 망설이고 고민했지요. 어떻게든 피하고 싶고, 비켜가고 싶어 몸부림친 적도 꽤 돼요.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다 마음이 편하니까 (입양)했죠. 그런데 지금은 이 아이들이 제게 가장 큰 감사 제목이 됐어요. 그래서 하나님과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또 감사해요. 처음부터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해서….”
온전한 경건의 삶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다. 흐릿하게 어머니가 우시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매일 갔던 서울의 남산도서관 근처에서 홀로 수면제 수십 알을 술과 함께 삼킨 기억이 떠올랐다.
원하던 대학과 학과에 합격했으나 입학금을 마련할 수 없던 가정형편을 비관해 시도한 자살이었다. 글 쓰는 걸 좋아해 국문과 진학을 소원했던 그의 꿈은 1976년 아버지의 돌연사로 무너졌다. 한의사인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77년 대입시험을 마친 한 이사는 자신의 꿈을 지원할 수 없는 무기력한 어머니와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는 하나님을 용서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다닌 교회에서 그가 배운 하나님은 사랑이 넘치는 존재였기에. 그는 아버지와 대입의 꿈이 사라진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의미로 자살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자살 미수에 그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닌가. 신에게 맞선다는 생각 자체도 무리였지만 가족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큰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공했으면 어떻게 할 뻔했나요. 하나님!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덤으로 주신 인생, 열심히 잘 살겠습니다.”
자살 시도가 실패하고 목숨을 건지자 한 이사는 다시 삶을 살게 허락한 하나님이 궁금해졌다. 성경 말씀에 답이 있을 거라 생각한 그는 병상에서 성경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한참 읽어내려가던 그는 히브리서 11∼12장에서 새로운 삶의 지향점을 찾았다.
“예전에도 성경은 읽었지만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히브리서 말씀을 읽으면서 앞으로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됐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 거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한 한 이사는 22살이던 79년, 서울역 인근에서 한 선교원이 운영하는 야간 신학교에 입학했다. 선교사가 꿈이었던 그는 2년간 낮엔 학원에서 일했고 밤엔 선교학을 공부했다.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살기 위해선 선교사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이사에게 지금의 남편 유연길(57)씨가 다가왔다. 이웃에 살아 고교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지만 이성으로 느낀 적은 없던 터였다. 유씨는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더니 이윽고 청혼을 했다. 한 이사는 거절했다. 선교를 계획하던 그에게 결혼은 개인의 안락을 추구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평소처럼 철원의 한 기도원에서 기도하던 그에게 문득 ‘하나님이 보낸 사람을 단번에 거절한 게 아닐까’란 생각이 스쳤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한 이사는 다시 성경을 펼쳤다. 유독 고아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사흘간 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부터 읽어내려가던 한 이사는 평소 꿈꾸던 ‘온전한 경건’에 대한 말씀을 발견했다. 야고보서 1장 27절 말씀이었다. 신기하게 이 말씀에도 고아가 포함돼 있었다.
“‘온전한 경건은 환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란 말씀을 보자마자 왜 제 눈에 고아와 관련한 말씀이 들어왔는지 알게 됐어요. 하나님도 고아와 같은 나를 양자 삼아주셨듯 저도 그렇게 살라는 확신이 들었지요. 입양 부모가 되기 위해선 결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두 가지 결혼 조건을 가지고 지금의 남편을 찾아갔습니다. 교회에 다니고, 자녀 1명을 입양하자는 것이었어요.”
저 아이들에겐 엄마가 필요해요
남편 유씨는 한 이사의 결혼 조건을 받아들였고 이들은 81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결혼한 그해 한 이사는 아들을 낳았다. 당시는 산아제한 정책을 국책 사업으로 시행하던 때였다. 한 이사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둘째를 임신하기 전 입양을 해야 한다고 남편에게 누차 말했다. 하지만 남편의 답은 매번 ‘경제적으로 더 준비가 될 때 고려해보자’였다. 입양이 차일피일 미뤄지자 더는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83년 불임 수술을 감행했다.
그의 수술 소식에 남편과 시부모는 대경실색했다. 한 이사에겐 단지 결혼 조건인 입양을 실천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으나 남편은 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의 의견차이는 결혼 이후 처음 아이를 입양했던 90년까지 10년간 계속됐다.
남편과 시부모로부터 입양 허락은 받지 못했지만 한 이사는 7살 난 첫째아들과 88년부터 3년간 고아원으로 매주 봉사활동을 다녔다. 그는 봉사활동을 다녀온 날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고아원에 봉사 갔다 오면 아이들에 비해 제가 너무 가진 게 많아 늘 미안했어요. 전 교육도 받았고 친구와 부모가 있으며 돌아갈 집도 있잖아요. 거기서 가장 어린 4살 아이의 후원자로 나서 돌봤는데 ‘아무리 친해도 저 아이와 나는 갈 길이 다르구나’란 생각을 하면 너무 힘든 거예요. 하루빨리 아이를 집에 데려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남편도 고아원 봉사활동에 관심을 보이며 참여했지만 입양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고아원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밤늦게까지 눈물을 흘리는 한 이사의 심경을 남편은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3년 동안의 읍소에 못 이겨 한 이사가 눈여겨본 아이를 보름간 집으로 데려오는 데는 동의했다. 그러나 이들 부부와 함께 산 시아버지는 이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헛된 기대를 심어줄 거란 우려에서였다.
“시아버지께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죠. 이해가 가요. 하지만 화를 내시는 아버님께 용기를 내 말씀드렸지요. ‘제가 데려온 아이는 분명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외모가 거칠고 분노 성향이 있는 데다 야뇨증도 있지요. 이런 분노를 가진 아이들이 죄를 범해 당신 친손자가 피해를 볼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누가 확언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아이를 맡으면 그래도 범죄 성향을 조금이나마 낮출 수 있지 않을까요.’ 사흘 뒤 다시 아이를 데리고 시아버지께 갔더니 직접 이름까지 지어놓고 가족으로 받아 주시더라고요.”
입양으로 첫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였지만 한 이사의 눈은 여전히 고아에게 가 있었다. 97년 외환위기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부모들이 아이를 버려 고아가 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뒤 그는 다시 입양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남편과 시부모는 첫 번째 입양 때보다 더 크게 반대했다.
“저는 고아들과 동시대에 사는 어른으로서 이들에게 어떤 도움도 못 주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슬펐어요. 대학 등록금을 못 구해 좌절하던 제 지난날도 떠올랐고요. 그래서 아버님께 다시 말씀드렸죠. ‘저도 어려운 아이 보고 덤덤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저 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프니 어떡하나요. 이제 고아는 헐벗고 배고프지 않아요. 다만 엄마가 없을 뿐이죠. 저는 제가 필요한 아이들에게 엄마가 돼 주고 싶어요.’”
한 이사의 결연한 뜻에 가족들은 두 손을 들었다. 그는 98년 6개월 된 남자아이를 입양했고 뒤이어 99년 8살, 9살 남자아이 둘을 집으로 데려왔다. 2001년엔 입양기관에서 소개받은 생후 6개월 된 딸을 맞아들였으며 2007년엔 지적장애 3급인 여자아이를 가족으로 맞았다. 2009년엔 11살, 12살 형제를 마지막으로 입양했다. 그의 나이 52세 때였다.
국내 입양 더 많은 사람들 마음 열어주길
한 이사는 99년 세워진 한국입양홍보회(MPAK)의 창단 멤버다. 그가 국내의 입양 인식 개선과 공개입양운동을 펼쳐온 MPAK 설립에 뜻을 모으게 된 계기는 14살 때 미국으로 입양돼 미항공우주국(NASA) 수석연구원이 된 스티븐 모리슨(57)씨를 만나고부터다. 입양기관 사회복지사의 소개로 한 이사를 만난 모리슨씨는 99년 당시 4명의 아이를 입양해 행복한 가정을 꾸린 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모리슨씨에게 국내 입양 활성화를 위해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을 때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어 망설였지요. 그러자 모리슨씨가 그러더군요. ‘당신의 삶이 국내 입양의 홍보수단 그 자체가 될 것’이라고….”
모리슨씨와 뜻을 함께한 한 이사는 2000년 1월 그의 집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이들의 소식이 각종 언론매체로 전국에 전해지자 30명으로 시작한 회원은 3개월 후 75명으로 늘었다.
올해로 14년째를 맞은 MPAK의 현재 회원은 1300가정이 넘는다. 그간 입양에 대한 정책이나 사회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국내 입양을 장려하기 위해 2006년부터 입양의 날이 제정됐고 올 7월부터는 미성년 친부모가 장기간 부양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부모 동의 없이도 입양될 수 있도록 한 민법(가족편) 개정안이 2011년 국회 본회의를 통과됐다. 한 이사는 이러한 변화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아 그간의 활동이 보람차다고 했다.
“MPAK이 2010년 전국대회를 하면서 10가지 대정부 건의안을 만들었는데 대부분 정책에 반영돼 얼마나 감격했는지 몰라요. 특히 재작년에 친부모가 방치한 아동은 부모 동의 없이 입양될 수 있도록 법안이 통과됐을 땐 엉엉 울었어요. 시설의 아이를 모두 다 품을 순 없지만 최소한 가정의 품에 보낼 수 있도록 기반을 닦는 데 보탬이 됐다는 사실이 기뻐서요.”
2011년 뇌경색 진단을 받은 그는 건강상 이유로 올 3월 회장 자리에서 내려왔다. 회장직을 그만두기 한 달 전, 한 이사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국내 입양 문화를 개선함으로써 건강하고 공정한 사회 추진에 기여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앞으로 한 이사는 일하느라 신경을 못 썼던 건강을 돌보고, 자녀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입양 관련 일을 하고 10자녀를 키우면서 항상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에요.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경제적으로 어려울 땐 우울증도 찾아왔으니까요. 그렇지만 제겐 아이들이 있고, 단기간 내 변화가 불가능해 보였던 입양법과 문화가 개선되도록 길을 닦고 허드렛일을 했기에 제가 해온 선택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아요. 비록 저는 여기까지지만 앞으로 국내 입양의 문을 활짝 여는 데 기독교인이 더 많이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죄인에서 하나님 자녀로 신분 변화를 겪은 이들만큼 입양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더 많은 사람이 입양에 대해 마음을 열도록 기독교인이 더 많이 나서주시길 기대합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