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희성] 당신을 위한 노래
입력 2013-05-09 18:47
그저 영화가 보고 싶은 날, 우리 얘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가 듣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런 날은 그냥 무작정 영화관에 가서 제일 빠른 시간, 제일 손님 없는 영화를 고르는데 그날 친구와 나를 기다리고 있던 영화는 ‘송 포 유(Song for you)’라는 영국 영화였다.
아내 마리온과 사별한 괴팍한 노인 아서, 아내의 마지막 잎새 같았던 노인합창단과 열혈 지휘자 선생, 그리고 의절한 아들. 포스터만 봐도 90여분의 이야기가 다 그려지는 뻔한 영화. 둘 다 영국식 까칠한 유머를 좋아하지만 별 기대 없이 스크린을 마주했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예측 가능한 결말을 가진 무난한 영화였다. 그런데도 딴생각은커녕 자세 한번 못 바꾸고 봤다. 마리온이 시한부 선고를 받는 순간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그들의 남은 시간을 지켜보는 것이 영화가 아닌 현실 같아 눈을 뗄 수 없었다. 순간순간 그 속에 서 있는 내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며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많이 드시라는 의사의 말에 내 심장이 서늘해졌고, 아이스크림이 좋다고 귓속말을 하는 마리온의 떨리는 목소리에 가슴이 먹먹했다. 유통기한을 알려주듯 마리온의 시한부 판정을 전하는 아서와 그 상처를 독설로 되갚는 아들의 철없고 무기력한 모습이 내 모습인 것 같아서 화가 났고, 죄스러움에 화면 속의 마리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 도적같이 찾아든 죽음의 순간, 마지막 숨을 삼키며 경련으로 몸을 떠는 마리온을 봤을 때는 목구멍이 틀어 막힌 것처럼 숨도 쉴 수가 없었다. 감정도 생각도 멈춘 것 같았다. 아서가 비명 같은 울음을 토해내기 전까지는. 아서의 통곡을 따라 봇물 터지듯 눈물을 쏟아낸 우리는 마리온에게 채 전하지 못한 마음을 담은 그의 노래를 들으며 얼얼한 마음을 달래고 나왔다.
며칠 후 친구의 어머니께서 암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 번째 암 선고였다. 첫 번째 수술 후 밤마다 어머니 숨소리를 확인했다던 친구는 두 번째 수술을 앞두고는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다 잘될 거라고 어설픈 위로를 건네는 나도 정신이 아득했으니 오죽하랴. 새삼스레 시간 가는 것이 무서웠다. 준비할 수도 연습할 수도 없는 일 앞에서 나는 얼마나 담대할 수 있을까. 조금의 후회도 남기지 않게 가진 마음 다 드릴 수 있을까. 부디 스스로 안심하고 인정할 수 있는 어엿한 어른이 될 수 있기를. 서약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김희성 (일본어 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