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 판매 배상 NO”… 乙을 위한 금융은 없다

입력 2013-05-09 17:55 수정 2013-05-09 22:24


“저게 사실 너희 이모 이야기다.” 저녁식사를 하던 조명심(가명·여)씨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TV 뉴스에서는 실적 압박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롯데백화점 여직원에 대한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식탁에서 웃고 장난치던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조씨는 지난해 4월 동생의 49재를 마친 뒤 “원금 보장 수렁에 빠진 설계사 투신, 부실상품 판매를 중단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서울 여의도 A생명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이 보험사 인천지점에서 14년간 설계사로 근무하던 동생 고 조유심(사망 당시 55세·여)씨는 지난해 3월 고층건물에서 몸을 던졌다. 빚을 내 보험 가입자들의 손실을 메우다 내린 극단적 선택이었다. 그는 회사에서 교육받은 대로 ‘파워덱스 연금보험’을 원금 보장형 상품이라며 팔았지만 주가가 급락하면서 원금 손실 사례가 속출했다. 가입자들의 거센 불만은 혼자 감당하기 힘들었다.

조씨의 시위는 지난해 9월 A생명의 회유로 끝을 맺었다. 조씨는 ‘위로금 6000만원을 지급받고 더 이상 회사를 비방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확인서에 서명했다. 동생이 남긴 1억4000만원의 채무만큼은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회사는 동생의 세 자녀에게 2000만원씩의 위로금만 지급하겠다고 했다.

A생명은 조씨가 합의하지 않으면 동영상으로 촬영한 항의 장면을 이용, 명예훼손 소송을 걸겠다고 했다. ‘원금을 보장한다는 파워덱스 연금보험이 불완전 상품 아니냐’는 민원을 받은 금융감독원은 “보험사의 주장대로 ‘원금’은 보험사의 사업비 등을 제한 나머지 금액일 수 있다”는 애매한 해석을 내렸다. 조씨는 확인서에 서명할 때 김밥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영업을 하던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고 했다.

많은 금융소비자들은 자신도 부당한 ‘갑을 관계’의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최형재(가명·여)씨는 K은행에 억울함을 느끼고 있다. 지난해 4월 20일 파밍(Pharming) 사기를 당해 일회용비밀번호(OTP)를 노출했는데, 정기적금 2000여만원 등 5000만원이 자신의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동안 은행 측이 본인확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씨는 “제2금융권인 저축은행에서도 본인이 직접 통장과 도장을 들고 창구에 가야 적금 중도해지가 가능한데, 정작 큰 은행에는 그런 과정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2011년 12월 말부터 피싱 피해를 우려, 은행권에 비대면거래 시 본인확인 절차를 강화하라고 지도했었다. 최씨는 민원 과정에서 K은행이 최씨의 사고 시점 이전에 콜센터 시스템 구축 등 본인확인 절차 강화 방안을 금감원에 보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기다렸던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의 회신은 ‘귀하의 사정은 안타깝지만… 더 이상 처리하기 어려움을 알려드린다’는 내용이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피싱 관련 소송에서 회사 책임에 대해 서로 다른 판결이 선고돼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금융당국은 올해 최우선 감독 과제를 소비자 보호에 두고 있다고 천명했다. 금융회사마다 소비자보호총괄책임자(CCO)를 선임하고, 불합리한 ‘갑’의 횡포를 일으키면 임원 제재까지 검토할 방침이다. 하지만 ‘을’의 신세를 한탄하는 금융소비자는 쉽게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9일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전 금융권의 금융분쟁조정 접수건수는 3만6242건으로 전년(3만3453건)보다 8.3% 증가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