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창환 (2) 박태로 선교사 등 세 祖父가 우리 집안 ‘신앙 뿌리’
입력 2013-05-09 17:22
황해도 황주군 천주면 외하리 신동(新洞). 내가 태어난 외가(外家) 동네다. ‘새뒤이’라고 불리는 그 마을은 완만한 언덕에 교회당이 있고, 마을 앞으로 시내가 흐르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다. 외할아버지는 교회 장로였다. 같은 황해노회 소속이었던 친할아버지(박태화 장로)와 사돈을 맺어 맏아들인 아버지(박경구)와 외할아버지의 셋째 딸인 어머니(김몽애) 사이에서 내가 태어났다.
우리 집안 얘기를 하자면 할아버지 3형제를 빼놓을 수 없다. 큰할아버지(박태로 선교사)는 우리 박씨 집안에서 가장 먼저 예수를 믿었다. 그 영향으로 형제들도 신앙을 갖게 됐다. 큰할아버지는 황해도 신천 지방의 유명한 망나니였던 김익두(나중에 목사가 됨)를 전도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재령읍 교회에서 장로가 되고 전도사로 섬기시기도 했다. 그리고 평양신학교를 졸업(5회)한 뒤 꼭 100년 전인 1913년, 한국장로교 총회 파견으로 중국 산동성(山東省) 지역 선교사로 떠나셨다. 한국교회가 중국으로 보낸 제1호 선교사였다.
친할아버지는 나에게 모험심과 개척정신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다. 신식 교육을 전혀 받지 않으신 분이었지만 ‘활천(活泉)’ ‘농민생활’ 등 잡지를 구독하시며 늘 새로운 것을 접하시려고 노력하셨다. 논밭을 일구면서도 양돈, 양봉, 양잠에 이어 정미소 경영까지 하셨으니까.
교회 일에도 앞장서신 분이다. 한번은 교회당 지붕에 물이 새서 지붕을 새로 깔아야 할 형편이 되자 한 마리밖에 없던 소를 내다팔아 비용을 마련하셨다. 지금으로 말하면 경운기나 트랙터쯤 될 만한 농번기의 필수품인데, 교회를 위해 선뜻 내놓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장손인 나를 경제적으로 밀어주시느라 애쓰신 분이기도 하다.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서 공부할 때, 일본 도쿄에 유학을 떠났을 때도 모든 비용을 아낌없이 채워주셨다.
장남인 내 밑으로는 여러 명의 동생들이 있었다. 모두 합하면 9남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 다음에 태어난 숙환과 왜정 말기 태어난 신자, 해방 후에 태어난 혜연 등 여동생 3명은 어릴 적 모두 병사했다. 나머지 창연 정연 옥연 주연 창헌까지 6남매가 함께 자랐다.
안타깝게도 어머니와 동생들은 6·25전쟁 통에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가족의 소식은 30년쯤 지난 1980년대 말 재미교포 출신의 목회자 등 여러 루트를 통해 전해들을 수 있었다. 창연과 주연은 황해도 송화 지역에 살고 있고, 옥연과 남동생 창헌은 행방불명이라고 했다. 대가족을 거느리시며 고생하셨던 어머니는 6·25전쟁이 나고 10여년 지난 1963년 황해도 송화에서 돌아가셨다는 비보도 전해 들었다. 6·25전쟁이 터지기 1년 전쯤 월남한 여동생 정연만이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다.
동생들 소식을 전해 들었을 무렵, 주위에서는 북한을 방문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권유가 있었다. 하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북한 당국이 6·25전쟁 때 해주 감옥에서 순교하신 아버지 가족의 상봉을 허락할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행여 만난다 하더라도 결국 북쪽 가족에게 돌아오는 것은 당국의 감시와 간섭일 테니 마음을 접었다.
그저 하나님의 때가 오기를 간곡히 기도하면서 인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잃고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을 때, 하나님은 70년이라는 기한을 정해주시면서 남은 자들의 귀환을 약속하셨다. 북한 땅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나는 하루하루 전능자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면서 그의 간섭과 역사를 기다릴 뿐이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