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남호철] 악덕 세금체납자와의 전쟁
입력 2013-05-09 17:41
“성실납세자가 우롱받지 않도록 소멸시효 대폭 연장하고 엄하게 처벌해야”
국민의 4대 의무에 납세가 포함돼 있다. 헌법 제38조에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납세의 의무를 진다’고 규정돼 있다. 국방의 의무(헌법 제39조)보다도 앞선다. 1967년부터 3월 3일을 ‘조세의 날’로 정하고 2000년 이후 ‘납세자의 날’로 바꿔 매년 기념식도 열린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세금은 내지 않아도 되는 돈’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의외로 널리 퍼져 있는 듯하다. 고액 납세자들일수록 그런 생각이 더 강해 보인다. 일부 악덕·상습 세금체납자를 보면 성실 납세자들은 공정하지 못하고 손해 본다는 느낌마저 들 게 분명하다. 더욱이 납세에 모범을 보여야 할 사회지도층이 재산을 빼돌리고 버티기로 일관하는 모습에는 기가 막힐 지경이다.
국세청 홈페이지에는 매년 고액체납자들의 실명과 나이, 직업 등 상세내역이 공개된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세금체납 1위는 정모 전 H철강 대표이다. 내지 않은 세금이 무려 2225억2700만원이다. 최모 전 S그룹 회장이 1073억1600만원으로 2위, 정모 전 H철강공업 대표가 644억6700만원으로 뒤를 이었다. 성인이 됨과 동시에 국세청 고액 체납자명단에 오른 이도 있다. 52억2300만원의 상속세를 안 낸 엄모씨와 상속세 49억6800만원을 체납한 엄씨의 동생은 20세가 된 2010년, 2011년 이름이 올랐다.
체납자들의 상당수는 교묘한 수법으로 세금납부를 피하고 있다. 제3자 명의로 재산을 빼돌려 놓은 뒤 무재산자라고 강변하면서도 고급 승용차를 굴리고 해외여행·골프 등을 즐기며 성실납세자들을 우롱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시가 적발한 지방세 체납자의 파렴치한 행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는 차를 구입하지 않고 벤츠, 아우디 같은 고급 외제 리스차량을 몰고 다니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하는 등 이들의 행태는 혀를 내두르게 한다.
체납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의 조치도 한층 강화되고 있다. 고액 체납자들에 대해 명단 공개, 자동차 번호판 및 각종 재산 압류, 출국금지, 신용카드정지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새로운 징수 방법이 속속 선보이면서 체납자들의 설 자리도 점점 줄어들고 체납세액 징수에도 가속이 붙고 있다.
악질 체납자들을 전담 관리하기 위해 지난해 신설된 국세청 ‘숨긴재산 무한추적팀’은 지난 한 해 1600여명으로부터 1조원이 넘는 체납 세금을 징수하는 성과를 거뒀다. 팀원 200명가량이 전국 각 지역에서 치밀하게 움직인 결과 한 명당 50억원 꼴로 거둬들인 셈이다. 고의적·지능적으로 세금 납부를 회피한 체납자와 이를 방조한 친·인척 등 110명은 검찰에 고발했다.
서울시 전체 체납액은 7000억원 정도 된다. 세금을 안 낸 42만명 가운데 8000명 이상이 3000만원 이상 고액체납자인 것으로 파악됐다. 2006년부터 고액체납자를 공개해 온 서울시 ‘38세금징수과’는 지난 7일 942명에게 명단 공개를 예고했다. 이들의 총 체납액은 1342억원으로, 1인당 평균 1억4246만원이다. 지난달에는 잇단 납부 독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지방소득세를 내지 않은 사업주 24명을 경찰에 고발했다. 2001년 신설된 38세금징수과가 거둬들인 세금은 5000억원을 돌파했다.
세금은 나라 및 지자체 살림살이의 원천이다. 납세를 국방, 교육, 근로와 함께 국민의 4대 의무 가운데 하나로 헌법에 못 박은 것도 이 때문이다. 세금체납은 국민으로서 누릴 혜택은 누리면서 의무는 지지 않겠다는 못된 심보다.
현재 고액체납자라 하더라도 세금부과 후 5년이 지나면 소멸시효가 완성된다. 소멸시효를 대폭 연장시키는 한편 강력한 징수 수단을 모두 동원하고 끝까지 추적해 형사처벌하는 것이 필요하다. 체납자 대부분이 기소유예 등 가벼운 처벌에 그칠 뿐 실형을 받지 않는 솜방망이 처벌도 바뀌어야 한다. ‘숨긴재산 무한추적팀’과 ‘38세금징수과’ 등의 조직이 더 이상 소용없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남호철 논설위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