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출신 젊은 작가들, 독일 문단 신주류 등장

입력 2013-05-09 17:06 수정 2013-05-09 18:07


20세기 마지막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독일의 노장 귄터 그라스는 2003년 출간한 시집 ‘라스트 댄스’에서 ‘마지막 춤’을 준비한다.

“이리 와, 나와 춤춰 주오. 내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한,/ 두 발로 설 수 있는 한,/ 걸음마에서 교차 스텝에 이르기까지, 내가 아는 것들은,/ 아직도 여전히 에이비시처럼 익숙하다오.” (귄터 그라스 ‘마지막 소원 세 가지’ 중)

명예로운 퇴장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노작가의 멜랑콜리는 독일 전후 문학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감성적으로 암시한다. 그라스의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중앙대 독일어문학과 교수인 노영돈 류신 등의 공저인 ‘독일 신세대 문학’(민음사)은 최근 독일 문단에 불고 있는 신세대 작가의 돌풍을 작가와 작품론을 통해 명쾌하게 짚어낸 괄목할 만한 저술이다.

흔히 ‘독일문학’ 하면 괴테, 실러,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귄터 그라스 등 몇몇 이름들이 떠오르지만 이때 우리는 어둡고 관념적이며 인간과 세계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무거운 문학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등장한 신세대 작가들은 이러한 전통에 반기를 들어 경쾌하고 가벼운 글쓰기를 실험하며 독일 문학의 지형을 바꾸어 나가고 있다. 요컨대 귄터 그라스의 ‘라스트 댄스’가 완결되는 무도회장에서 퍼스트 스텝을 성공적으로 밟은 신세대 그룹은 토마스 부르시히, 잉고 슐체, 예니 에르펜베크 등 동독 출신의 젊은 작가들이다.

류 교수는 통일 이후 독일 문학계의 지형변화를 다룬 ‘무질서하게 융기한 고원의 풍경’이라는 글에서 존재 기반을 상실한 동독 2∼3세대 작가들이 통일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고 있으며, 절박한 위기의식을 오히려 창작을 위해서 긍정적인 조건으로 활용하고 있는지를 조목조목 들려준다.

“조금 과장하게 말하자면, 역설적이게도 동독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이후 ‘순 동독 산 작가’들이 펼치는 순수한 동독 문학의 시대가 바야흐로 열리고 있는 것이다. ‘동독이 몰락한 이후 비로소 당의 명령이나 검열에 구속받지 않는 진정하고 순수한 동독 문학이 자생적으로 생겨났다’는 볼프강 에머리히의 다소 과감한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동독 출신 작가들의 활약상에 대한 귄터 그라스의 언급도 인상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동독 작가들의 경우 개인주의적으로 자신을 과장하는 경향이 덜하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틀림없이 그들에게 이야기할 주제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은 상실을 그려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정체성 상실, 이력의 상실을 말입니다. 동독 출신 작가들이 더 좋은 책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역사의 과정 속에서 패배자가 거둔 작은 승리입니다.”

류 교수는 “통일 이후 동독 문학은 끊임없이 발송되는 부고장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며 “동서독 문학의 진정한 회통을 위해서는 먼저 동독 문학에 대한 진정한 재평가와 재발견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신세대 그룹은 카렌 두베, 초에 예니, 유디트 헤르만 등 젊은 여성작가들과 ‘세계를 재다’(2005)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른 다니엘 켈만 등 과거 독일 문학의 진지함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나려는 젊은 작가들이다. 카렌 두베의 첫 장편소설 ‘폭우’는 컬트영화 같은 외설적이고 엽기적인 장면 구성과 치밀한 심리 묘사로 세기말의 부패한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실존을 끈덕지게 캐묻는다는 호평을 받았다.

몽환과 환상 기법을 통해 미시적 일상의 이면을 포착한 유디트 헤르만의 단편집 ‘여름 별장, 그 후’는 40만 부 이상 팔려나갔으며 18개 언어로 번역됐다. 초에 예니의 ‘꽃가루방’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18세 소녀의 성장통을 테크노 파티, 컴퓨터 게임 등 최첨단 문화 코드 속에 버무려내며 25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고 21개국에서 번역 출간됐다.

노영돈 교수는 “관념적이고 난해하며 근엄했던 독일 문학의 전통과 결별한 신세대 작가들이 재미있고 가벼우며 쿨한 문학으로 독일은 물론 세계에서 성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저작은 통일시대를 대비해야 하는 한민족 문화권의 선행지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더욱 민감할 뿐더러 독일 문학의 현재를 조망할 수 있는 특별한 시선을 제공한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