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 신작 시집 ‘작은 산’
입력 2013-05-09 17:06 수정 2013-05-09 22:32
시인 박철(53·사진)은 첫 시집 ‘김포행 막차’(1990) 후기에 이렇게 다짐했다. “나의 시에 있어서 급선무는 무엇보다 이웃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신작 시집 ‘작은 산’(실천문학사)은 그로부터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도 이웃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라는 윤리적 다짐이 초지일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변한 게 있다면 회복의 방식일 것이다.
시인은 일면식이 없는 한 유명 평론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서명을 한 뒤 문득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갈등하다가 면지를 찢어낸 뒤 가끔 들르는 식당 여주인에게 저간의 사정을 말하고 그 파본을 건넸다고 한다. “며칠 뒤 비 오는 날 전화가 왔다/ 아귀찜을 했는데 양이 많아/ 버리긴 아깝고// 둘은 이상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뭔가 서로 맛있는 것을/ 품에 안은/ 그런 눈빛을 주고받으며”(‘버리긴 아깝고’ 일부)
버리기 아까운 건 면지를 찢어낸 시집 파본이나 남아도는 아귀찜이 아니라 그것을 말없이 교환한 시인 자신과 식당 여주인의 눈빛일 것이다. 오래 전 스스로 맹세한 윤리적 다짐이 ‘서로 맛있는 것을 품에 안은 눈빛’에 담겼으니, 이는 이웃이라는 주변적인 것을 호출하는 방식이 성숙되고 세련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리를 저는 금택씨가 축구공을 사서 어느 가을 밤, 남이 안보는 새벽 세 시 넘어 인조 잔디 깔린 근린공원에서 골대를 향해 냅다 발길질을 했다는 사연을 담은 시에는 그 주변적인 것이 더욱 확장되고 있다. “그렇게 남들 사십 년 차는 공을 삼십 분만에 다 차 넣더란다/ 하현달이 벼린 칼처럼 맑은 스무하루/ 숨이 턱턱 걸려 잠시 쉴 때 공원 옆 5단지 아파트의/ 앉은뱅이 재분 씨가 난간을 잡고 내려다보더란다/ 어둠 속의 노처녀 재분 씨를 하현달이 내려다보더란다.”(‘달’ 부분)
금택씨나 재분씨를 바라보는 건 정녕 하현달이 아니라 시인 자신인 것이다. 시인의 눈이 달처럼 휘영청 밝아졌으니 사물이 그리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박철은 식당 여주인이나 금택씨나 재분씨 머리 위에 후광을 하나씩 밝혀놓고 있다. 이러한 후광은 소외된 이웃이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이웃들을 윤리적인 애정으로 바라보지 않는 한 불가능한 아우라일 것이다.
“공원에 앉아 먼 산 보는데 곁의 노인이 묻지도 않는 말을 한다// 방문 열어놓고 잔다고 나가란다/ 좀도둑이라도 들어오라고/ 샛바람이라도 들어오라고/ 방문 열고 잔다고 방 비우란다// 아, 저 먼 산/ 먼 그리움”(‘방’ 전문)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