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집 옮겨! 권리금 떠안고” “책 내주마! 인세 포기하면”

입력 2013-05-08 18:26 수정 2013-05-08 22:20


‘남양유업’ 사태 계기로 살펴본 ‘갑의 횡포’… 불공정 실태 어느 정도길래

우리 사회 ‘갑(甲)의 횡포’는 남양유업 한 기업에 국한된 사안은 아니다. 편의점 및 제빵업계는 물론 출판업계, 기간제교사 등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고질병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남양유업 사건을 계기로 다른 업종의 대표적 ‘갑을 관계’ 불공정행위도 잡아낸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솜방망이 처벌과 ‘나만 안 당하면 괜찮다’는 시민의식이 개선되지 않는 한 제2, 제3의 남양유업 사태는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갑의 횡포’ 고질적인 업종과 분야는=‘갑을 관계’를 통한 불공정행위가 일상화된 대표적 업종은 프랜차이즈 업계다. 가맹본부(갑)와 가맹점(을) 간 ‘노예계약’을 통해 구조적으로 갑이 수익을 독점하는 구조가 고착화돼 있다. 최근 잇따른 가맹점주 자살로 부각된 편의점 업계도 포함되지만 소수의 ‘빵 재벌’이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제빵 업계의 갑을관계 관행이 대표적이다.

파리크라상은 브랜드 ‘파리바게뜨’를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빵집의 절대강자다. 2011년 기준 베이커리 시장 매출액만 1조3085억원으로 3년 전(8470억원)에 비해 크게 늘었다. 시장 점유율은 78.3%에 달한다. 이렇게 파리크라상이 몸집을 불리는 동안 가맹점주는 철저히 갑을 위해 뛰는 을의 위치에 있었다. 가령 점포 내부에 카페를 만드는 과정에서 점주들은 평균 1억1100만원의 인테리어 비용 가운데 83%가량을 부담해야 했다. 본부는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다. 점주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파리크라상은 또 상권이 발달한 지역으로 가게를 이전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매장 규모가 더 큰 곳으로 이전한 점주들은 추가로 드는 권리금과 임대료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재계뿐 아니라 출판·교육계도 사정은 비슷하다. 무명작가들에게 출판사는 ‘슈퍼 갑’으로 군림한 지 오래다. 무명작가들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책을 출간하겠다는 꿈 하나로 버티며 저작권을 출판사에 넘겨주거나 인세를 포기하기까지 한다. 동화작가 박지현(가명·29·여)씨는 지금까지 6권의 책을 썼다. 그러나 자신이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책은 단 한 권뿐이다. 첫 번째 책을 낼 때는 저작권과 인세를 모두 포기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기간제교사로 일하는 박모(25·여)씨는 8일 “기간제교사라는 이유로 방학에 일한 것은 월급으로 주지 않으려고 계약을 (방학기간) 피해서 한다”며 “학교가 ‘꼼수’를 부려도 다른 학교에서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워 부당한 일을 문제 제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서울대 이공계 박사과정생인 이모(27)씨는 “지도교수 손에 내 인생이 달려 있기 때문에 운전기사 노릇도 하는데, ‘고학력 도우미’나 다름없다”며 “교수가 논문 실수를 해놓고 잘못을 조교에게 떠넘기기도 한다”고 말했다.

◇왜 근절 안될까=공정위는 남양유업 사건을 계기로 경제계 각 업종에서 불공정행위를 일삼는 갑의 횡포에 대한 전방위 조사에 착수할 방침이다. 노대래 공정거래위원장은 이와 관련해 이날 간부회의에서 “사안이 터지고 난 뒤 타이밍을 놓치게 되면 자칫 뒷북행정이 될 수 있다”며 “이슈가 될 만한 사안이 무엇인지 미리 검토해서 개선방안을 찾아야 한다”며 선제대응을 주문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지금까지 업종별로 시장지위 남용 및 불공정행위를 잡아내 왔지만 솔직히 근절됐다고 말할 순 없다”고 말했다.

왜 이런 문제가 반복될까. 우선 갑이 불공정행위를 끊을 만큼 강력한 제재가 이뤄지지 않았다. 파리크라상은 2010년에도 가맹계약을 체결하기 전 점주들에게 정보공개서를 제공하지 않는 등의 횡포를 부려 공정위로부터 시정명령을 받았다. 파리크라상은 올해 재범으로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가맹점주에게 점포 확장·이전을 강요하며 ‘갑’의 횡포를 휘두른 파리크라상에 지난달 부과된 과징금은 5억7200만원에 불과하다. 당초 공정위 조사팀은 과징금을 100억원가량 산출했지만 형량을 결정하는 전체회의에서 증거 불충분 이유로 크게 감액됐다.

공정위는 또 갑을관계를 바로잡기 위한 조사 과정에서도 애를 먹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한 가맹점주가 본부의 불공정행위를 신고하면 ‘을 집단’인 다른 가맹점주가 증언을 해줘야 하는데 이후 닥쳐올 ‘갑의 보복’ 때문에 대부분 쉬쉬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세종=이성규 백상진 기자, 김유나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