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청업체 품질관리 명분 내세워 기술·인력 빼 가”

입력 2013-05-08 18:10 수정 2013-05-08 18:16


김문겸 중소기업옴부즈만은 8일 “을(乙)들의 하소연을 듣다보면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는 억울한 사람이 수많은 분야에 너무 많아서 좌절감마저 든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옴부즈만은 중소기업·소상공인·자영업자의 애로사항을 발굴해 개선하는 정부기관이다. 충북 충주의 IBK기업은행 연수원에서 만난 김 옴부즈만은 ‘남양유업 사태’는 극히 일부라고 했다. 직원들과 워크숍을 하다 인터뷰에 응한 그는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갑(甲)의 횡포를 조목조목 지적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그를 찾아온 한 위생용품 판매 대리점주는 “본사에서 일방적으로 무리한 판매목표를 책정해 통보하는 바람에 모자란 금액을 자기 돈으로 메워야 했다”고 토로했다. 강매에 시달리거나 잘 팔리지 않는 재고품을 끼워서 떠넘기는 일은 다반사라고 한다. 김 옴부즈만은 “사무용 가구 대리점주가 왔었는데, 회사에서 신제품 매출을 올리려고 대리점마다 강제로 할당해 ‘울며 겨자 먹기’로 구입할 수밖에 없었던 경우였다”며 “재고 상품도 대리점 주인들은 다음에 인기 상품 판매에서 피해를 볼까봐 어쩔 수 없이 떠안는다”고 전했다. 업종을 불문하고 대리점주들이 본사의 횡포에 시달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갑이 일방적으로 주문을 취소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김 옴부즈만은 “한 오디오 회사는 아파트 시공업체로부터 선주문을 받아 생산까지 다 해놨는데 뒤늦게 ‘없던 일로 하자’는 통보가 와서 낭패를 봤다”며 “구두계약이나 선주문에 대한 구체적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애플의 경우 중소기업이 미리 생산관리 등을 할 수 있도록 통상 6개월 전에 발주 물량을 알려주는데 우리나라는 갑자기 제품을 교체해 피해를 끼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대형마트가 유통업체에 부리는 횡포도 지적했다. 대형마트가 안 팔린 물건을 몇 백 상자씩 다른 소매점에 팔아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유통업체는 이렇게 유통 물량을 빼앗겨도 대형마트에 밉보일까봐 아무 소리 못한다는 것이다. 또 기업에서 품질 관리 명목으로 협력업체 공장에 다녀간 뒤 기술이나 인력을 빼간다는 하소연도 있었다고 한다.

김 옴부즈만은 “공공기관도 이런 갑의 횡포에서 예외가 아니다. 공공기관이 말도 안 되는 거래조건으로 납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는 “한 공공기관이 단체복을 맞추면서 중소업체에 입찰을 줬는데 옷에 대형 의류업체 로고를 박아 달라고 하더라. 하청을 받으란 소리인데 이 업체는 이익이 크게 줄더라도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제품 인증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새 제품을 들고 찾아온 작은 기업을 무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는 ‘공무원의 체화된 갑질’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피해를 당해도 약자들은 털어놓기 어렵고 신고나 소송을 해도 대응할 힘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 옴부즈만은 “체념 반 분노 반으로 털어놓는데 해결할 방법이 없어 난감할 때가 많다”며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중소기업옴부즈만은 중소기업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있지만 ‘갑’에게 시정을 요구할 권한은 없다. 김 옴부즈만은 현재 시정 요구권을 갖기 위한 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그는 “대기업 등 갑이 각성하고 을을 배려하는 문화가 정착되기까지 정부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