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심 흐르는 저 강물에 수심을 띄워보내다

입력 2013-05-08 17:25


‘영남 제일의 동천’ 거창 수승대

덕유산 골골에서 발원한 계곡들이 두루마리 산수화처럼 흐르다 하나로 만나 천하절경을 이루는 곳이 수승대이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의 수승대는 영남 제일의 동천(洞天: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으로 알려진 안의삼동(安義三洞) 계곡 중 으뜸인 원학동계곡에 둥지를 틀고 있다. 안의삼동 계곡은 구한말 안의군에 속해 있던 화림동계곡, 용추계곡, 원학동계곡(월성계곡)을 이르는 말로 조선시대에 정자가 100여개나 있었다고 한다.

명승 제53호로 지정된 수승대는 남덕유산(1507m)을 비롯해 해발 1000m가 넘는 26개의 산에 둘러싸인 거창에서도 경치가 가장 수려하다. 특히 수달래와 신록이 어우러지는 5월에는 거울처럼 맑은 위천이 분홍색 물감과 연두색 물감을 흩뿌린 듯 파스텔 톤으로 채색된다. 강돌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은 에메랄드빛 깊은 소(沼)에는 정자의 반영도 선명해 선경을 연출한다.

수승대는 위천 옆에 위치한 관수루(觀水樓)에서 볼 때 가장 운치 있다. 구연서원의 문루인 관수루는 외관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누각을 떠받친 1층 기둥들이 앞쪽은 곧게 뻗었지만 뒤쪽의 기둥 4개는 휘어지고 뒤틀린 느티나무의 투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멋을 그대로 살렸다. 특히 첫 번째 기둥은 뒤틀림의 정도가 심해 아예 S라인을 그리고 있다. 휘어진 기둥도 누각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다는 치밀한 계산이 맞아떨어진 건축가의 자존심이라고나 할까.

여느 누각과 달리 관수루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없다. 관수루와 맞닿은 거북 모양의 바위를 계단 삼아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자연친화적으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누각에 서면 여인의 피부처럼 하얀 너럭바위를 미끄러진 물이 거북바위 앞 구연(龜淵)에서 잠시 머물다 흘러가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맹자에 나오는 관수(觀水)는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군자의 학문하는 자세를 말한다. 조선시대 유학자로 거북바위 앞 산자락에 요수정을 짓고 후학을 양성한 요수 신권(1501∼1573)을 기리는 누각의 이름으로 이보다 더 합당한 단어가 어디에 있을까.

관수루 앞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구연서원과 역사를 함께 이 나무는 본래 열매가 열리지 않는 수나무였다. 득남을 기원하는 아낙들이 밑둥치를 한주먹씩 잘라간 자리에 우레탄을 발랐는데 어느 해부턴가 우레탄의 화학성분에 의해 열매가 열리는 암나무로 변신했다고 한다. 고사 위기에 처한 고목을 살린다고 바른 우레탄이 나무의 성전환을 초래했다니 아랫마을에 있는 암나무가 기가 막힐 일이다.

거북바위로 불리는 수승대는 10m 높이의 커다란 바위로 사면에는 한시와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져있다. 생김새가 거북을 닮아 구연대(龜淵臺) 또는 암구대(岩龜臺)로 불리는 수승대는 백제의 사신을 신라로 파견할 때 송별연을 열었던 곳. 백제의 국세가 기울어 신라에 보낸 사신이 행여 돌아오지 못할까 근심하며 보냈다고 해서 수송대(愁送臺)라 불렀다.

“수송을 수승이라 새롭게 이름 하노니/ 봄을 만난 경치 더욱 아름답구나/ 먼 산의 꽃들은 방긋거리고/ 응달진 골짜기에 잔설이 보이누나/ 나의 눈 수승대로 자꾸만 쏠려/ 수승을 그리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언젠가 한 두루미 술을 가지고/ 수승의 절경을 만끽 하리라”

수송대가 수승대(搜勝臺)로 이름이 바뀐 것은 1543년의 일. 퇴계 이황이 거창을 지나면서 수송대의 내력을 듣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고 수송과 수승이 소리가 같으므로 ‘수승’으로 고친다고 시를 지어 보냈다고 한다. 유학자 신권은 퇴계의 편지를 받자마자 거북바위에 수승대라는 글을 새겼다고 한다. 바위에는 퇴계의 시와 함께 거창으로 낙향해 후학을 양성하던 갈천 임훈의 화답시도 나란히 새겨져 있다.

선인들의 흔적은 흐르는 물 속에서도 선명하다. 수승대 앞 너럭바위에는 ‘연반석’과 ‘세필짐’이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연반석은 스승 앞에서 제자들이 벼룩을 갈던 바위란 뜻이고, 세필짐은 수업을 마친 제자들이 흐르는 물에 붓을 씻던 자리라는 의미. 구연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은 너럭바위에서 시를 지은 후 스승으로부터 막걸리 한 사발을 받았다고 한다. 거북바위 앞 너럭바위에는 실제로 막걸리 한 말이 들어가는 구멍이 뚫려 있다.

신권이 풍류를 즐기며 후학을 양성했던 요수정은 거북바위와 구연서원을 내려다보는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자연암반을 초석으로 이용한 요수정은 특이하게도 정자 가운데에 불을 때는 방이 있다. 이른 아침에 불을 때면 굴뚝에서 나온 연기가 정자를 감싸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니 선인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건축과 과학까지 동원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는 증거이리라.

관수루와 요수정에는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시가 빼곡하게 걸려 있다. 하나 같이 수승대의 풍경에 감탄하고 신권을 기리는 시로 글솜씨가 물 흐르듯 유려하다. 구름에 달 가듯이 거창으로 유람을 온 시인 박목월이 시 한 수 남기지 않을 리 없다. 요수정 뒤에는 “세상은 변했지만 물소리는 한결 같다. 수승대 바람결에 선생을 느끼고 골짜기 울리는 물소리에 선생의 음성이 살아나신다”고 노래한 박목월의 시비가 솔향에 취해 요수정을 바라보고 있다.

수승대 관광지에는 유난히 소나무가 많다. 위천에 조성한 섬솔은 강돌을 쌓아 만든 인공섬으로 소나무 수백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거북바위 등에도 소나무가 올라앉았고, 황산마을 입구의 척수대에는 낙락장송이 위엄을 더하고 있다. 척수대(滌水臺)는 백제의 사신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근심을 씻었다는 곳.

수승대 소나무 중 으뜸은 요수정 앞 절벽에 뿌리를 내린 두 그루의 낙락장송. 용이 꿈틀거리는 형상의 소나무는 수승대를 향해 절을 하듯 누워 있다. 행여 비바람에 뿌리가 뽑힐까봐 연리목이 돼 서로가 서로를 붙들고 있는 형상이다. 그리고 거북바위 옆에는 소나무 고사목 한 그루가 전봇대처럼 우뚝 솟아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죽어서 더 꼿꼿한 모습이 거창 선비의 절개를 상징한다고나 할까.

거창=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