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임항] 갑을 관계

입력 2013-05-08 17:37

이성용 베인앤컴퍼니코리아 대표는 2004년 펴낸 화제의 저서 ‘한국을 버려라’에서 갑을 관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물론 비즈니스 세계는 냉혹한 것이지만, 냉혹한 것과 불공정한 것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니다.…한국의 중소기업 CEO들이 (을로서의) 이 모든 장애물을 감수하면서 어떻게 수지타산을 맞추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한국이 갑과 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세계적인 비즈니스 파트너들 사이에 악명을 얻게 될 것이다.”

그로부터 9년이 흐른 지금 갑을 관계의 폐해가 여전하거나 오히려 심화되는 것은 왜일까. 전후 한국의 경제성장 모델과 전략이 단초를 제공했다. 박정희 정부는 급속한 수출증대를 위해 수직적 계열화를 추진했고, 전략산업에 대한 독과점을 용인했다. 이는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풍토와 불법 및 편법 관행을 낳았다. 사업 인허가가 곧 돈방석을 의미했기에 뇌물과 부패가 만연했다. 대기업의 독과점이 심해질수록 독자적 기술을 지니고 독립적으로 영업하는 중소기업은 설 땅을 잃어갔다. 결국 수직적 권력관계인 갑을 관계가 더 기승을 부리는 악순환이 생겼다. 우리나라 중소 제조업체 가운데 약 80%가 주로 대기업 하청물량으로 먹고 산다.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은 비율이다.

전두환 정부는 중소기업을 육성하고 경제 민주화를 추진하기도 했지만, 의도와 상관없이 사회 전반에 갑을 관계를 조장하기도 했다. 1980년부터 중소기업 고유업종제도, 소비자 보호법, 독점규제와 공정거래법 등이 본격 시행됐다. 실제 이 시기에 중소기업의 생산 및 고용비중이 크게 높아져 중소기업 전성시대를 이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당시 싹쓸이(전두환) 고스톱으로 상징되는 승자독식주의와 패자에 대한 새디즘(가학취향)이 사회에 활개를 쳤다. 권력이나 돈을 가진 계층의 특권의식도 커져 갔다. 중소기업 고유업종제도는 외환위기 이후 규제완화 바람과 존폐논란 속에 겨우 명맥을 이어오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폐지됐다.

이른바 ‘갑질’을 하다 몰매 맞는 사례가 최근 늘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권력 관계의 남용이 임계점에 이르렀다는 신호일 수 있다. 갑이 자행하는 가해의 유형들은 대부분 현행법으로도 금지된 것들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검찰과 관료들은 법을 강력하게 집행하겠다는 의지가 부족하다. 사정당국이 일벌백계를 통해 정의가 살아 있다는 믿음, 즉 내가 불법적으로 해코지나 약탈을 당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기도록 만들어야 한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