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乙 사회가 변한다… 억눌렸던 乙의 분노, 경제민주화 바람타고 폭발

입력 2013-05-07 18:32


갑(甲)의 횡포에 시달려야 했던 을(乙)의 반격이 시작됐다.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감정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는 현재 성장통을 겪으며 ‘갑을’ 간 불합리한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을 밟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진단했다.

포스코에너지의 한 임원이 항공사 승무원을 때린 ‘라면 상무’ 사건으로 해당 임원이 사직했고, 제빵회사 회장이 호텔 직원을 때린 ‘빵 회장’ 사건에선 해당 회사가 폐업했다. 남양유업 영업직원의 대리점주 욕설사태는 소비자 불매운동으로 이어지는 등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갑의 횡포’ 사례가 잇따라 터져 나오자 인터넷 게시판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또 다른 ‘을’들의 성토장이 됐다. 다음 아고라에는 지난 5일 한 배달원의 글이 올라왔다. 대리점에서 배달원으로 일하려면 보증금 100만원을 내라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아프거나 개인 사정으로 배달을 못 나갈 경우 대리점에서 보증금을 몰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작성자는 ‘배달원들은 하루 만원이 너무나 큰 사람들인데 너무한 처사 아니냐’고 토로했다.

한 통신사 상담원은 지난 6일 포털 네이트에 ‘회사에서 신용카드 가입을 강요한다’는 글을 올렸다. 회사가 상담원들에게 제휴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으면 상담사 평가에 반영해 월급을 깎겠다고 협박했다는 것이다. 회계사 직원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클라이언트에게 뺨을 맞았다는 글도 올라왔다. 홍보대행사에 일하는 장모(42)씨는 “대기업 홍보실 직원이 접대는 물론이고 자신이 다니는 야간대학원의 논문 대필을 요구하기도 했다”며 “지금도 그 회사는 쳐다보기조차 싫을 정도”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에 곪을 대로 곪아 있던 기형적 갑을 관계의 패러다임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 중심엔 SNS와 인터넷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과거 ‘갑과 을’ 사이에서 속앓이 했던 개인적 불만들이 공론화되면서 권위적 갑의 행태가 대중적인 비난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그동안 관행적으로 이뤄지던 ‘갑’들의 권위적 태도가 제한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이었다면 이제는 실시간으로 퍼져나가 여론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찬웅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역시 “인터넷의 폭발력이 부당한 사례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경제민주화 요구가 확산되는 상황도 을의 반격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국가주도형 경제개발 과정에서 형성된 전근대적 기업문화가 경제민주화 요구와 맞물리면서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황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기존 사회의 경직화된 구조가 갑과 을의 권력 관계를 양극화시켰다면 이 관계를 민주적으로 만드는 것이 창조경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갑을 관계는 단순 계약 관계인데 우리나라는 비대칭적 관계로 굳어져 있어 갑들이 먼저 과거 관행을 탈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요즘엔 갑들도 처신에 부쩍 신경을 쓰고 있다.

LG 계열사는 올 초 업무 윤리 규범을 정비하면서 업무 관계자로부터 경조금품을 받지 않기로 했다. 포스코는 오는 22일 정준양 회장 주재로 포스코 계열사 임원 350여명이 참여하는 윤리실천 다짐대회를 열어 윤리실천 결의문을 채택하고 재발방지를 선서할 계획이다.

‘감정노동자’들이 많은 유통업계도 개선 방안을 내놓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이달부터 ‘갑을 관계’를 되돌아보자는 취지의 강의를 시작했다. 판촉사원이나 협력업체 직원에 대해 예의를 지키도록 당부하고, 매장관리자와 판촉사원의 역할을 서로 바꿔보는 ‘롤플레잉(역할 연기)’도 실시한다. 한국전력공사는 7일 지나친 반말이나 하대를 하지 말자는 내용이 담긴 ‘권위주의 타파 14계명’을 발표했다.

이용상 조성은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