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아콜루데오 모이(나를 따르라)
입력 2013-05-07 17:23
요한복음 21장 15∼19절
신약성경의 큰 줄기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본받음’(아콜루데오)입니다. 본받음이란 ‘뒤따른다’ ‘동행한다’ ‘제자가 된다’는 단계를 말합니다. 이 3단계를 함축한 예수님의 명령이 ‘아콜루데오 모이’ 즉,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해야 합니다.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질문과 대답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대화 가운데 ‘아가페’와 ‘필로스’의 구별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요한복음서 기자의 의도는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믿음을 아가페의 차원으로 올리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의 어떤 특별한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특별한 관계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왜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물으셨을까요. 여기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님의 양을 먹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양을 먹인다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를 돌보는 일입니다. 즉 제자들은 목회의 사명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목회는 개별 교회의 문제에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교회일치 차원의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이 오늘 본문 18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의 목회자요 지도자로 사는 것만이 아니라 고난을, 심지어 순교까지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뜻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말씀이 곧 ‘아콜루데오 모이’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과 고난을 감수하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운명과 일체가 되겠다는 결단입니다. 곧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피하고 부활의 영광에만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기독교는 종교적 위로나, 힐링이나, 기복이 중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를 부인하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웬만한 결단이 아니면 제 정신으로는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르라’는 말씀의 중심을 모른 채 무조건 믿는 광신자가 되든지, 아니면 그 부르심을 하찮게 생각하는 냉소주의자가 됩니다. 둘 다 왜곡된 기독교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콜루데오 모이’라는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왜 믿음이 없냐고 책임을 묻는 말씀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압박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예수의 제자로 사느냐 하는 엄중한 질문이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제자라고 한다면 그분의 운명에 온전히 집중할 것입니다. 그분의 운명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에게 일어난 일이 실제로 무엇인지 더 깊이 아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첫 걸음입니다.
절대 잊지 마십시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콜루데오 모이’. 끝까지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정성영 목사(예심선교회 교육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