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명희] 임을 위한 행진곡
입력 2013-05-06 19:10
1987년 봄 캠퍼스의 철쭉은 유난히 붉었다. 도서관 앞 광장에선 전두환 전 대통령이 강행한 4·13 호헌조치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가 연일 열리면서 최루가스 자욱한 캠퍼스를 오가야 했다. 5월엔 수업거부로 이어지며 강의실이 아닌 인문대 잔디밭으로 등교했다. 교문 앞을 지날 때면 전경들은 거침없이 가방을 뒤졌고, 대학 동기는 과토론회에서 나눠준 유인물 때문에 닭장차(경찰버스)에 끌려가 흠씬 두들겨 맞고 하룻밤 경찰서 신세를 진 뒤에 풀려나기도 했다.
그해 5월, 학과 선배들과 상황극을 하면서 처음 접한 5·18 광주학살은 충격이었다. 광주 출신 선배와 동기들은 중학생 시절 광주에서 겪은 아비규환의 생생한 현장을 증언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후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은 5·17 비상계엄확대조치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 곤봉과 대검으로 무자비하게 살생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군홧발에 짓밟혔고, 군인들이 임신부의 배를 갈랐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로 1980년 5월의 광주는 흉흉했다.
2년 뒤인 1982년 2월 20일 광주 망월동 묘지에서는 영혼결혼식이 열렸다. 신랑은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다 계엄군의 총칼에 숨진 전남대 대학생 윤상원씨이고, 신부는 학생 신분을 속이고 공장에 취업해 노동운동가로 활약하며 1978년 광천동 들불야학을 주도했던 박기순씨였다.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에 사용된 15곡 가운데 말미를 장식한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소설가 황석영씨가 백기완씨의 시 ‘묏 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1980년 12월)에서 노랫말을 따왔고, 당시 전남대생 김종률씨가 작곡했다. 광주의 한 단칸방에서 군용담요를 창에 대고 숨죽여 카세트에 녹음한 이 노래가 복제돼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5공화국 시절 금지곡이 됐다가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면서 풀렸다.
30년 동안 5·18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며 널리 불렸던 이 노래를 놔두고 이명박 정부는 기념식에서 ‘방아타령’을 넣겠다고 하더니 현 정부는 수천만원 예산을 들여 새로운 추모곡을 만든다고 한다. 5·18 유족회 등 관련단체는 이 노래가 빠지면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반발하고 있다. 진혼곡조차 제대로 못 부른다면 민주주의를 위해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고 한 이들을 무슨 낯으로 볼 수 있을까.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