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땅 요르단 가다] 모세의 길 걸으며 고대 사막도시 장관 맛본다
입력 2013-05-06 17:44
#1 느보산에서 바라본 요단강(요르단강) 너머 가나안땅은 노을에 물들고 있었다. 장관이다. 출애굽 40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눈앞에 펼쳐 있다. 하지만 모세는 깊은 회한에 젖었다.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신 3:25∼26)고 말씀하신다. 끝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모세의 안타까운 모습이 생생하다. <느보산>
#2 모세 이후 약 1400년이 지났다. 요한은 자기와 비교가 안 되게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이 오심을 예언했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침례)를 받으려 했다. 요한이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 오시나이까” 하자 예수께서 “이제 허락하라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므로 요한이 세례를 했다(마 3:11·13∼15).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복음을 전하는 공생애 3년의 길을 떠난다. <베다니 침례터>
요르단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욥, 모세, 엘리야 등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선지자들의 행적이 녹아 있는 곳이다. 남북을 잇는 3개 도로인 왕의 대로, 사해도로, 사막고속도로를 따라 아카바, 와디 럼, 페트라, 마다바, 베다니, 느보산, 암만, 제라쉬, 움카이스 등 성경 관련 명소들이 펼쳐져 있다. 구약시대부터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언급된 지명이 120여 곳이고 등록된 유적지가 12만여 곳에 이르는 성서의 땅이다.
◇느보산=모세가 40년 광야생활 끝에 결국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120세의 나이에 이곳에서 죽어 장사지내졌고, 예레미야가 성전의 언약궤를 묻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모세가 죽기 전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다는 비스가는 느보산의 세 번째 봉우리인 해발 710m의 ‘시야가’를 말한다. 이곳에서는 요단강 계곡과 사해, 모압평야 그리고 이스라엘의 고도(古都) 여리고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 여기에는 여호와와 모세를 원망하는 백성들을 불뱀이 물었을 때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 살렸다는 이야기를 형상화한 놋뱀 장대가 서 있다(이탈리아 조각가 지오바니 판토니 작).
모세가 묻힌 것을 기념해 세운 모세기념교회는 4세기 중후반경 건립된 후 두 차례 걸쳐 개축됐고 지금도 수리중이며 빠르면 올 연말쯤 재개관할 예정이다.
느보산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인 마다바(성경엔 메드바)에는 성서지리에 중요한 모자이크 지도가 발견된 성 조지교회가 있다. 성서지리로는 가장 오래된(560년경 제작) 이 지도는 이집트 나일강부터 터키까지 상세히 나타내고 있으며 예루살렘을 신앙의 중심지로 보여주고 있다.
◇베다니=예수님이 침례를 받은 베다니 침례터는 사해(死海) 북쪽에 인접해 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린 이스라엘의 베다니와는 다른 곳이다. 여호와 유일신을 지킨 선지자 엘리야가 승천한 ‘엘리야 언덕’과 요한침례교회터 사이에 있다. 침례를 베풀 때 사용하던 물 저장고, 침례장소로 물을 유입시킨 수로가 최근 발굴됐다. 또 예수님과 요한이 활동하던 1세기의 그릇·동전·돌 조각과 4∼5세기경 비잔틴시대의 유적, 로마시대 예배당이 발견됐다.
2009년 당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이곳을 방문해 성지임을 강조하고 신앙의 의미를 알리는 메시지를 선포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리스정교회, 러시아정교회, 천주교가 앞다퉈 예수님 침례 기념교회를 세우고 있어 한국교회도 관심 가질 만할 것 같다.
침례터는 사해와 비슷한 해수면 아래 약 400m에 위치해 있으며 지상에서 가장 낮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것도 모자라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가셔서 침례를 받으셨다.
물론 이스라엘은 요르단의 예수님 침례터를 인정하지 않지만 장소 논란보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침례의 신앙적 의미를 새기는 것이 중요하겠다.
◇페트라=요르단이 자랑하는 국보 1호. 수도 암만 남부 250㎞에 위치한 페트라는 BC 6세기에 아랍계 유목민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고대도시로 사막 바위산에 숨어 있다. 뱀처럼 구불거리는 1.2㎞의 좁은 길(시크)을 따라 협곡 양쪽에 화려한 석조 건축물이 도열해 있다. 시크를 지나 처음 만나는 알 카즈네는 페트라의 상징으로 ‘보물창고’라고 불리는데 BC 1세기에 건축됐고 나바테아족의 왕인 아레타스 3세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알 카즈네 뒤로 바위산 절벽을 파고 깎고 다듬어서 만든 3000명 수용 규모의 원형극장, 왕들의 무덤을 안치한 대규모 신전, 비잔틴 시대의 교회와 집 등이 위용을 뽐낸다. 페트라는 영화 인디애나 존스 ‘최후의 성전’ 배경이 됐고 지난 3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문하면서 더 유명해졌다.
요르단 관광청에 따르면 장정 60만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는 ‘왕의 대로’를 따라 가나안으로 이동하던 중 페트라에 이른다. 모세가 물을 구하는 과정에서 바위를 두 번 치는 불충을 저질러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는 페트라 인근 와디 무사의 ‘모세의 샘’은 아직도 물을 쏟아내고 있다. 모세는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에돔 족속에게 페트라의 통과를 간청했으나 거절당해 동쪽으로 우회하는 곤궁을 겪었다. 이 와중에 모세의 형 아론이 죽어 제벨하룬 정상에 묻는 슬픔을 맛보기도 했다.
여호와께서는 ‘높은 바위틈에 거주하며 교만한 에돔’에 경고하셨다.(오바댜 1:3∼4)
◇제라쉬=암만에서 북쪽으로 4.5㎞에 위치해 있다. 모세에 의해 정복된 길르앗 땅으로 신약시대엔 거라사 지방으로 불렸다. BC 332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설된 10개 위성도시 중 하나로 ‘1000개의 기둥도시’로 불릴 정도로 건물 기둥이 많이 남아 있다.
AD 6세기에는 교회가 14개나 있을 정도로 기독교가 융성했지만, 그 후 페르시아, 이슬람에 의해 점령되었다. 726년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806년 발견됐다.
암만(요르단)=글·사진 윤정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