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의 여행] 김산과 님 웨일즈의 사랑
입력 2013-05-05 18:42
“나는 헬렌(님 웨일즈의 본명)이 김산을 인간적으로 깊이 사랑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영희(1929∼2010) 전 한양대 교수가 ‘아리랑’(님 웨일즈·김산 공저/동녘출판사) 개정판(2005)에 쓴 ‘추천 글’의 한 대목이다. 과연 님 웨일즈는 김산을 사랑했을까.
웨일즈가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군대의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중화소비에트 구역인 옌안(延安)에 잠행한 건 1937년 초여름이었다. 그가 옌안에서 인터뷰한 혁명가들은 모두 22명. 그들 가운데 조선혁명청년동맹 대표로 옌안에 머물고 있던 조선인 혁명가 김산은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두 달 동안 22차례 김산을 인터뷰한다.
그렇더라도 사랑이라니. 당시 웨일즈는 에드거 스노(훗날 ‘중국의 붉은 별’ 저자)와 결혼한 지 4년도 되지 않았다. 미국 유타 주의 한 변호사 딸로 태어난 그는 재원이었다. 스노 회고에 따르면 웨일즈는 중국 외교가에서 아름다움과 지성을 겸비한 그리스 여신으로 통했다. 그런 그가 옌안의 동굴가옥에서 폐결핵에 걸린 김산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니. 스노가 마오쩌둥(毛澤東)을 취재하고 있을 때 웨일즈는 옌안의 동굴가옥에서 영원의 시간을 보았던 것이다.
웨일즈는 자서전 ‘중국에 바친 나의 청춘’에 이렇게 썼다. “동굴에 살게 되면 영원과 직면하게 된다. 자연히 생각하는 시간이 그만큼 길어지는 것이다. 유기질 토양의 깊은 곳에서는 전류가 흘러나오며 땅에 귀를 대보면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온 음파의 반향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옌안의 토굴에서 영원의 음향을 듣는 사람이 웨일즈였으니, 그가 동굴의 혁명가였던 김산을 사랑했을 개연성은 높다. 그에게 영원의 동굴과 김산은 같은 말이 아니었을까. 사람은 그렇게 자기만의 동굴을 판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