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3부)] 광부 출신 최수문씨의 회고 “고장난 무릎은 조국에 젊음 바친 훈장”

입력 2013-05-05 18:51 수정 2013-05-08 15:40

“이 부실한 무릎과 허리가 독일 탄광에서 젊은 날을 바친 내 ‘훈장’입니다.”

4일(현지시간) 에센에서 열린 파독 50주년 기념식에서 만난 최수문(67)씨는 독일에서 지난 40여년 동안 광부로, 또 기술자로 조국과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 그 대가로 몸은 진통제를 달고 살아야 할 만큼 많이 쇠했다. 하지만 함께 이 땅에 왔던 옛 동료들을 만날 생각으로 이날 기념식에 한달음에 달려왔다고 했다. 그러나 최씨는 곧 몇몇 친구들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듣고 고개를 떨궜다. 최씨는 “함께 땅에 묻힐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가슴이 아파온다”고 말했다.

최씨는 25세이던 1971년 뒤셀도르프 인근 광산에서 독일 생활을 시작했다. 연애, 결혼생활, 자녀교육 모두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그가 들려준 얘기에서 분단과 가난으로 어려웠던 대한민국 출신 광부들의 아슬아슬했던 독일에서의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독일에서 광부 일을 하던 72년 최씨는 광산 기숙사에 놀러온 한국 간호사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문제는 간호사의 근무지가 베를린이었다는 점. 하노버까지 비행기를 타고, 또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 먼 거리도 문제였지만 당시 베를린은 출입이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60년대 후반 불거진 ‘동백림 간첩단 사건’ 영향 때문이다. 최씨는 “당시 베를린에 가기 위해서는 동독 땅을 지나야 갈 수 있었는데 동독 지역을 통과할 때 여권에 도장이 찍히면 ‘중앙정보부’에 잡혀가던 시절이었다”며 “그래서 여권을 잃어버렸다고 재발급받기도 하고, 여권 모양의 종이를 만들어 도장만 받고 버리기도 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74년 결혼을 앞두고 문제가 또 불거졌다. 바로 호적 문제였다. 독일에서는 가족 수당이 많아 같은 일을 해도 자녀가 있는 기혼자와 독신자와의 급여 차이가 평균 30% 이상 벌어진다. 이 같은 정보를 들은 파독 광부들 중 일부는 ‘호적상 기혼자’로 둔갑해 입국하거나, 독일에서 호적을 바꾼 사례가 많았다. 최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처가에선 이 같은 사정을 알 리 만무했다.

최씨는 “김천간호학교를 국가장학생으로 졸업한 똑똑한 딸이 결혼한다는 남자가 호적을 보니 애가 둘이나 딸린 유부남이니 반대를 안 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며 “편지도 쓰고, 찾아가기도 하고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회고했다.

최씨는 결혼 후 베를린에서 냉난방 설비공으로 일했다. 지옥 같았던 탄광 야근보다 덜 힘들었지만 자존심을 버려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갈등은 컸다. 최씨는 “땅속에 있을 때는 안 보이니까 괜찮았지만 냉난방 일을 시작할 때는 창피해서 작업복을 입고 길거리를 못 나갔다”고 말했다. 최씨는 독일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독일 기술서적을 공부했고, 건강이 악화돼 2003년까지 은퇴할 때까지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했다.

그는 조국을 위해 헌신했지만 기초생활수급자들이 받는 월 360유로(약 52만원)로 어렵게 생활하는 동료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최씨는 “나이 들어 독일에 광부로 온 동료 중 일부는 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근무연한인 30년을 채우지 못해 생활이 어렵다”면서 “기념식에 오고 싶어도 교통비와 회비가 없어 오지 못한 사람도 많다”고 전했다. 조국을 위해 헌신했지만 어렵게 사는 이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해 보인다.

에센(독일)=한장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