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남혁상] 한·미 정상회담

입력 2013-05-05 17:31

한국과 미국 양국의 첫 정상회담은 한국전쟁 중에 이뤄졌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으로 1952년 12월 방한해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이때 두 사람의 만남을 정상회담으로 보긴 어렵다. 아이젠하워는 당선자 시절이었고, 방한 목적 역시 전황 파악에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재건회의 의장 시절 1961년 11월 존 F 케네디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찾았다. 당시 미국 방문의 주된 목적은 경제원조 문제였다. 박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해 대규모 경제 지원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이 결과가 나오기까진 우여곡절이 많았다. 박 대통령은 케네디와의 정상회담에 앞서 딘 러스크 국무장관과 예비회담을 열어야 했다. 한 나라의 정상과 장관 간 공식 회담은 격이 맞지 않지만 여러 여건 상 예비회담이 필요했다고 한다. 당시 경제개발계획을 이행할 막대한 재원 마련이 시급했던 정부로선 미국의 경제원조가 그만큼 절실했던 것이다. 군사정권은 특히 자신의 정통성을 대외적으로 인정받는 수단으로 한·미 정상회담을 활용했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뒤에도 한·미관계는 동맹을 확인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한·미 양국은 동맹관계지만 정상회담이 항상 성공적인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았다. 2001년 3월 백악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거론된다.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자신감을 가졌던 김 대통령은 갓 출범한 부시 행정부에 햇볕정책을 설득하려 했지만 공감을 전혀 이끌어내지 못했다. 부시는 기자회견에서 김 대통령을 옆에 두고 “북한 지도자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강한 톤으로 얘기했다. 김 대통령을 “디스 맨(This man)”으로 부르기도 했다.

2005년 11월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경주 정상회담은 사상 최악의 회담이었다. 두 정상은 미국 정부의 대북 금융제재 문제를 놓고 한 시간 이상 논쟁을 벌였다. 2008년 4월 이명박 대통령의 첫 한·미 정상회담은 화기애애하게 진행됐지만, 이후 쇠고기 파동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국내에선 큰 정치적 상처를 입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이 임박했다. 동맹 60주년을 기념하고 향후 60년을 준비하는 공동선언이 채택될 예정이다. 양국 관계를 건설적, 미래지향적으로 논의하고 뒷말이 나오지 않는 성공적인 회담이 되길 기대해 본다.

남혁상 차장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