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의승 (16) “인재를 키우자” 창업과 동시에 장학재단 설립

입력 2013-05-05 17:15


나는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인재를 키우는 일이라고 믿는다. 사실 사람을 키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업은 없을 것이다. 특히 소외된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을 위한 장학사업은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실 일이다. 나 스스로가 어렵게 학창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분투, 노력하는 아이들에게 많은 관심이 간다.

1983년 창업과 동시에 장학사업을 실시했다. 당시 인쇄소를 경영하는 친구에게 부탁해 금박으로 된 장학증서를 갖고 모교의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우양장학재단의 장학금 배정 비율은 일반 학생 20%, 시설출신 학생 40%, 탈북 청소년 및 청년 40%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장학재단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탈북 청년들을 대상으로 가장 활발한 장학사업을 펼치는 곳이 우양재단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이 시대 우리가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안이 탈북 청소년과 청년 문제라고 본다. 북한에서 죽을 고비를 넘어 한국에 왔지만 막상 이곳에서도 평안한 낙원의 삶이 전개되지 않는다. 냉혹한 생존의 현실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극동방송 운영위원을 하면서 철의 장막(구소련)과 죽의 장막(중국)을 향한 방송 선교 사역을 펼쳤다. 당시 우리의 관심사는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쏘는 선교 방송을 청취하고 있는가’였다.

1980년대 중반에 중국의 심양 등지에 있는 조선족 동포 가운데 20여명이 당시로서는 드물게 일본 연수를 떠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어렵사리 그 정보를 미리 알게 되어 그중 두 명을 비공식적으로 한국에 초청했다. 그들은 한국에 와서 “남한이 이렇게 잘살 줄 몰랐다”면서 천국과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매 주일 라디오를 켜서 극동방송이 송출한 선교 방송을 듣는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동안의 수고가 헛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감격해했다.

마지막 날, 저녁식사를 하면서 나는 천국과 같은 남한을 떠나야 하는 그들을 보며 가슴이 아파 한마디 했다. “모두들 가족들과 여기 오셔서 함께 사시면 좋을 텐데요….” 그러자 그중 한 명이 정색하며 “우리는 여기 안 살 겁네다. 여기 내려와도 못 삽네다”라고 말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그들은 남한이 분명 천국 같은 곳이지만 이미 공산 체제에 익숙한 자신들은 내려와 살 엄두가 안 난다는 것이었다.

“남한에 와도 못 삽네다”라는 그 말이 평생 가슴에 남았다. ‘아, 북한이나 중국 동포들에게는 남한에 와서 몸 붙이고 사는 것 자체가 엄청난 난관이겠구나.’

사업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북한에서 온 청년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었다. 이미 많은 도움의 사업을 펼치고 있었지만 탈북 청년들을 돕는 일만은 꼭 하기 원했다. 남한의 시설 출신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탈북 청년들에 비하면 생활력이 있었다. 북한에서 온 청년들은 열등의식이 강하다.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재단에서는 1990년대부터 그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다.

매년 세미나를 통해서 남한에 정착한 탈북 청년들의 애로점도 파악하고 책도 내기 시작했다. 지금 국내에서 청년 실업이 심각한 문제인 가운데 탈북 청년들의 취업전선이 어떠한지도 계속 추적하고 있다. 또한 대한축구협회의 도움을 받아 탈북 청년들끼리 대항하는 통일축구대회를 열고 있다. 마침 해군사관학교 후배였던 이갑진 전 해병대사령관이 축구협회 부회장이었다. 이 부회장은 10명의 정식 심판을 파견해 주었다. 일년 내내 예선을 거처 결승 토너먼트에는 10팀이 올라온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탈북 청년들끼리 강한 연대의식이 형성된다.

정리=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