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에 묻은 쓸쓸함 평생 서린 ‘恨’ 때문일까

입력 2013-05-05 17:36 수정 2013-05-05 17:45


조선 후기 ‘남종문인화’ 대가 표암 강세황 탄생 300주년

조선후기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는 단원 김홍도(1745~1806)의 멘토이자 스승, 사군자 ‘매란국죽(梅蘭菊竹)’을 동시에 그린 최초의 화가, 60세에 벼슬을 얻어 원로 최고기구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입지전적인 인물.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로 불린 표암 강세황(1713∼1791). 올해 탄생 300주년을 맞은 그를 조명하는 전시가 잇따라 열린다.

표암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예조판서를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갈 정도로 명문가 자제였다. 그러나 맏형이 과거시험 부정행위와 역적모의 등에 연루되면서 집안이 몰락했다. 서른두 살에 지금의 경기도 안산으로 낙향한 그는 30년간 농사를 짓고 서화를 그리며 지냈다. 사대부로 태어나 뜻을 펴지 못한 그는 자연히 집권 세력과 사회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됐다.

그림에서도 겸재 정선(1676∼1759)을 필두로 꽃피운 진경산수화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자연 풍경보다는 서정성과 시대상황을 강조한 명나라의 남종문인화를 받아들여 그만의 필법으로 조선남종화풍을 정착시켰다. 조선남종화풍의 대표작은 ‘소림묘옥(疏林묘屋’. 성긴 숲 속의 띠 풀집을 표현한 작품으로 대상을 간략히 묘사하고 강한 필선으로 윤곽을 부각시키며 여백을 강조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그렸음에도 왠지 우울하고 쓸쓸한 느낌이 묻어나는 것은 암울한 삶을 바라보는 표암의 감정이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불우했던 그는 환갑이 되던 1773년 영조의 특명으로 영릉(세종의 무덤) 참봉(종9품 말단)이 되고 정조가 즉위하던 1776년에 63세로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이후 정조의 각별한 배려로 71세 때 정2품에 올라 평생 쌓인 한을 풀 수 있었다.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12일부터 26일까지 춘계정기전 ‘표암(豹菴)과 조선남종화파전’을 연다. 표암의 산수화와 사군자 등 18점과 조선남종화의 바탕을 이룬 현재 심사정(1707∼1769), 표암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칠칠 최북(1712∼1786), 표암의 필법을 이어받은 단원과 혜원 신윤복(1758∼?) 등 당대를 풍미한 화가 20명의 남종산수화 70여점을 선보인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은 “예술은 환희나 고통이라는 상반되는 두 가지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상실의 감정에서 출발한 표암의 작품은 밀려난 사람들의 쓸쓸함을 보여주고 있다. 성공한 이들보다 실패한 이들이 더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표암의 그림이 더욱 큰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조시대 예원(藝苑·예술계)의 수장이었던 표암의 예술세계를 전반적으로 살펴보기에는 다소 허전하다. 간송미술관의 표암 소장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 아쉬움은 6월 25일부터 두 달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강세황: 예술로 꽃피운 조선 지식인의 삶’ 전을 통해 대신할 수 있다. 보물 제590호인 자화상과 서양화풍을 실험한 산수화 ‘영통동구(靈通洞口)’ 등 100여점이 출품된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