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5월의 슬픈 아이들] ① 상처받은 영혼이 사는 곳, 레바논 베카
입력 2013-05-03 18:14 수정 2013-05-03 19:26
아기는 버려진 대리석 공장에서 태어났다. 시리아와 접경지대인 레바논 베카의 대리석 공장에는 바람을 막아줄 창도 제대로 된 난방장치도 없었다. 페인트조차 칠해지지 않은 이 잿빛 공장에서 아기는 엄마 품에 안겨 잠을 잤다. 3일 전 태어난 아기 얼굴엔 아직 주름과 홍조가 남아 있다. 붓기가 채 가라앉지 않아 퉁퉁 부은 산모 옆에는 허술한 난로 하나가 있을 뿐이다. 이 공장에 사는 또 다른 난민 여성들이 산모에게서 아기를 받았다. 가난한 산모와 남편은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바람도 못 막는 버려진 공장, 그 한구석에도 새 생명이…
이 공장은 짓다 만 건물 같았다. 빨랫줄에 걸린 난민들의 옷가지가 건물 밖에서 선명하게 보일 만큼 2층 벽이 뚫려 있었다. 지난달 17일 공장에 도착해 계단을 타고 2층에 올라갔다. 계단에 난간은 없었다. 한 아이에게 과자가 든 복주머니와 필통을 건넸다. 소년은 필통을 든 팔을 다시 내게 쭉 뻗었다. “전 학교에 갈 수 없어요. 필통을 쓸 일이 없어요.”
2층엔 몇 개의 방이 있었다. 작업실로 이용하던 걸 여섯 가족이 각자의 방으로 썼다. “여기 아기가 있어요.” 누군가 말하지 않았다면 건물 폐허에 새 생명이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폐허 속에서 태어난 아기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선물했다. 신이 생명을 허락하신 공간마다 고요한 기쁨이 흐르곤 하는데 버려진 공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장에 풍요로움이나 안락함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오며 가며 잠자는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환하게 웃지는 못해도 아기를 보는 사람들의 눈동자엔 전쟁이 남긴 분노나 증오, 공포가 없었다. 갓 태어난 생명을 바라보는 두 눈이었다.
여섯 살 두아
사라진 생명도 있었다. 2년간의 시리아 전쟁은 7만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심장에 포탄 파편이 튀어 사망한 여섯 살, 두아도 그랬다.
시리아 바바아므르 지역에 살던 아흐마드 가족이 레바논에 피난 온 것도 딸 두아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정부군은 바바아므르 지역을 29일간 포위했고, 폭격과 검문 때문에 고향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지난해 2월 28일 아흐마드와 부인이 잠시 바바아므르 집을 비운 사이 두아는 친구와 우물가에 갔다.
정부군도 반군도 아닌 여섯 살 두아는 우물에서 포탄 파편에 맞았다. 뒤늦게 부모가 달려왔지만 손을 쓸 수 없었다. 사방은 검문으로 막혔고, 바바아므르 지역엔 정식 의료기관이 없었다. 원래 시리아와 레바논 국경은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하지만 당시는 비상 상황이었다. 아흐마드는 레바논으로 갈 수 있는 서류를 꾸미기 위해 48시간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100달러를 들여 서류를 만들었지만 딸은 점점 죽음으로 향했다.
“아빠, 도와줘.”
아흐마드의 품에서 힘겹게 말하던 두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말을 할 수 없게 됐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힘겨워하더니 차츰 의식을 잃었다. 두아는 레바논으로 떠나기 전 시리아에서 눈을 감았다. 아흐마드는 작은 두아의 시신을 가슴에 안고 국경택시(레바논과 시리아를 오가는 택시)를 탔다. 두아는 레바논 땅에 묻혔다.
지난달 16일 베카에서 만난 아흐마드는 두아를 데려간 세상에 화가 난 듯 보였다. 아흐마드를 포함한 16명이 작은 월세방에 살고 있었다. 이날 온종일 비가 오락가락했다. 집에서 얘기를 마치고 아흐마드와 마당에 나가니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이젠 괜찮은가요?” “따맘, 따맘(그래, 그래).” 아흐마드는 앞을 바라본 채 세찬 비에만 눈을 고정시켰다. 그의 옆모습은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는 표정이 역력했다.
“갈 곳이 없잖아.”
인구 400여만명이 사는 레바논에서 시리아 난민만 45만명. 과거 수차례 다른 국가의 전쟁 뒷마당이 됐던 레바논은 시리아 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난민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지난 15∼19일 레바논 베카에서 만난 시리아 난민들의 삶은 어느 것 하나 온전하지 못했다.
시리아의 거리에서 토막 난 시체를 너무 자주 목격해 아무렇지 않게 됐다는 소년 우사마(15). 어린 나이에도 부모에게 난민 생활을 불평하지 않는 우사마의 동생 압델 마넴(11). 그리고 지난 2월 피난 온 이후 벌어들인 소득이 겨우 75달러인 이들의 아버지 마흐무드(38). 넘쳐나는 난민으로 일자리가 부족한 레바논에선 남보다 5달러라도 적은 임금을 불러야 막노동을 할 수 있었다.
세 아이에게 무엇을 먹여야 할까. 무엇을 먹일 수 있을까. 가장 무함마드의 걱정은 돈과 음식이다. 스무 살 첫째 아들도 걱정이다. 레바논으로 함께 피난 온 첫째 아들은 얼마 전 사라졌다. 레바논에서 약을 구입한 아들이 다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시리아에 가버린 것이다. 다섯 달 전 시리아 정부군의 칼에 다리가 찔려 걷는 게 불편한 아들이었다. 아들은 시리아에 있을 때도 피를 철철 흘릴 만큼 위중한 이웃집 남자를 안고 병원까지 달려갔었다. 아픈 사람들을 보면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아들은 건강할까, 아프진 않을까…. 지금 아들과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공습으로 두 손가락을 잃은 다섯 살 꼬마 자셈은 사고 이후 엄마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자셈의 이웃집에는 등에 파편을 맞고 걸을 수 없는 아이와 팔을 잃은 아이가 살았다.
여성들은 군인들의 성폭행이 두려워 레바논으로 도망쳤다. “정부군이 여자들의 옷을 벗겨 탱크 앞에 세워두고 인간 방패막이로 세웠다는 얘기를 들었다.” “100명의 여자들을 집단 성폭행했다더라.” “시리아 수용소에 잠깐 끌려갔던 한 남자 변호사는 열다섯 소녀가 당하는 걸 봤다더라.” 베카의 난민 여성들은 이런 이야기를 전하며 몸서리쳤다.
네 아이의 엄마 아비르(37)는 베카에서 만난 난민 중 가장 상처를 잘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아비르는 월세 200달러를 내고 휘발유 냄새가 진동하는 차고에 산다. 난민이 많다 보니 월세도 급등했다.
아비르는 매일 베카의 자바다니산을 바라본다. 이 산만 넘어가면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다. “처음 차고에 온 날, 잠을 자지 못했어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잖아요. 어떨 땐 울다가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냐고 괜히 남편한테 소리 지르곤 해요.” 남편은 아비르에게 이렇게 답한다고 했다. “그럼, 어떡해. 갈 데도 없는걸.”
레바논 베카=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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