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 폭주하는 의원실] 가지각색 민원 쇄도… 법개정 사례도

입력 2013-05-04 03:58 수정 2013-05-04 12:21

국회는 여야 할 것 없이 각종 민원에 시달린다. 전국 각지에서 “○○ 좀 해 달라”는 요청이 이곳 300명 국회의원실로 모두 집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의원들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팔이라도 걷어붙이고, 아예 손도 댈 수 없는 안타까운 민원 앞에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한탄한다.

#1. “나이 먹은 게 무슨 죄라고….” 지난 1일 민주통합당 김관영 의원실에 전화를 걸어온 30대 남성은 울먹였다. “전날 통과된 ‘청년고용특별법’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였다. 법안은 김 의원의 ‘1호 법안’으로 공공기관 청년 고용(정원의 3%이상)을 의무화하는 내용이다. 이 남성은 “법률상 청년이 15세 이상 29세 이하인데 저 같은 30대는 어쩌라는 거냐. 역차별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의원실은 청년의 범위에 대해 상임위 차원에서 재검토를 문의한 상태다.

#2. 90대 할아버지는 최근 새누리당 한 의원을 찾았다. 미혼인데 호적상에 아들이 있어서 기초수급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연이었다. 수소문해보니 남동생이 혼외 자식을 몰래 올려놓았던 것. 하지만 남동생은 “모르는 일이다. 나도 수급자다. 절대 호적을 옮길 수 없다”며 싸움이 커졌다. 보좌관은 “할아버지와 호적상 아들 간에 통장거래내역 자료 등을 제출해 마무리지었다”고 했다.

#3. “누군가 날 감시하고 있어요.” 매일 같이 한 의원실로 출근 도장을 찍는 50대 여성은 국가정보원과 경찰이 자신을 미행한다고 주장했다. 수돗물도, 공기도 믿고 마실 수가 없다고 했다. 의원실 관계자는 “보좌진이라면 다 한번쯤은 이런 민원인을 겪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원실로 모이는 민원 중에는 아무리 금배지를 단 국회의원이라도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태반이다. “우리 아들 군 자대 배치를 옮겨 달라” “딸 학교 배정 바꿔줘라” 등이 가장 흔한 예다. 누군가는 아예 “취직시켜 달라”며 이력서를 보내기도 한다. 개개인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SOS를 친 것이지만 법과 원칙이 있는 터라 무턱대고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때문에 의원실마다 나름의 노하우를 축적한다. 민주당 진성준 의원실 관계자는 3일 “규칙 위반 없이 재량권 정도로 해결할 무난한 방법을 찾는다”며 “군 민원의 경우 ‘자녀를 잘 돌보고 있다’는 중대장의 전화로 걱정을 덜어주는 게 일례”라고 했다.

민원 해결 과정에서 허탕을 치거나 이해관계에 휘말리는 일도 허다하다. 새누리당 전하진 의원실은 “아래층에서 누군가 본드를 한다”는 한 아주머니의 얘기를 듣고 곧바로 분당경찰서에 신고했으나, 조사 결과 아주머니의 정신병 소견이 발견됐다. 민주당 신학용 의원은 3년 전 ‘영어교육진흥 특별법안’을 제출했다가 된통 시달렸다. 토익, 토플을 대체할 국내 영어 공인 시험을 마련하자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관련 주식이 폭락했고, 개인 주주들이 “제발 법안 좀 포기해 달라”고 읍소한 것이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민원도 적지 않다. “의원님과 결혼하고 싶다”거나 “내 딸과 선보시라” “모 회사 홍보 사진 한 장 같이 찍어 달라”는 등이다. 민주당 ‘24시 민원센터’를 통해 접수되는 하루 30여건의 민원 중에서도 4∼5건을 제외하곤 황당 케이스라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란 계시를 받았다거나 ‘18대 대선이 조작됐으니 재검표하라’는 반협박성 전화도 이어지고 있다. 또 일방적인 욕설과 비방이 섞인 전화도 있다. 한 중진 의원실에는 대북 현안이 터질 때마다 어김없이 “빨갱이 민주당 때문에 나라꼴이 엉망이다. 의원 X들은 군대라도 다녀왔느냐”는 항의가 빗발친다.

하지만 민원을 토대로 법 개정을 이끌어내는 사례도 많다. 개인택시기사인 김계한(59)씨는 지난해 7월 차량의 잦은 고장으로 서비스센터를 찾았지만 “주행거리 6만km 이하만 무상수리가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김씨의 고충을 전해들은 새누리당 김용태 의원실은 ‘소비자 기본법 시행령’을 검토하던 중 개인 택시기사가 영세 1인사업자임에도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 개정안을 발의해 통과시켰다. 한 보좌관은 “별별 민원인들이 많지만 하찮다고 생각되는 것들도 응대하다보면 문제점이 분명 있더라”고 했다.

김아진 유동근 기자 ahjin8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