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교회가 있었네-의항교회] 이 바다 깊이를 어찌 알아? 하나님 은혜로움이 그러하듯

입력 2013-05-03 17:26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교회

의항교회는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개목마을에 있다. 이 마을 어귀가 개미 목처럼 잘록하다고 해 개목마을, 개미목말이라 불린 것으로 전해진다. 의항리라는 행정구역명도 개미 의(蟻) 자에 목 항(項) 자를 썼다. 마을 인근에 구름포해수욕장과 의항리해수욕장이 있다.

개목마을은 2007년 12월 7일 태안 기름유출 사건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만리포 북서쪽 10㎞ 지점에서 해상크레인과 유조선이 부딪쳐 원유 1만2500여㎘가 유출돼 바다와 갯벌이 오염됐다.

하지만 지난달 25일 찾아간 바닷가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깨끗하게 회복돼 있었다. 주민들은 “원상복구가 어려울 줄 알았는데 제 모습을 되찾은 것은 기적”이라고 말했다.

자원봉사자들 기도로 성장한 교회

주민들은 한국 해상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기름유출 사고에 대해 “지옥 같았다”고 기억했다. 당시 “몇 십년이 지나도 복구되지 않는다” “복구되더라도 이전처럼 고기잡이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고 평온한 마을 분위기는 흉흉해졌다. 주민들은 기름띠로 뒤덮인 바다를 보며 절망했다.

주민 300여명 대부분의 생계가 바다에 매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봄, 여름에 간재미 놀래미 우럭 따위를 잡고 가을에 꽃게를 잡는다. 굴 양식도 큰 수입원이었다. 또 하루 5∼6시간 일해서 낙지 100여 마리를 잡으면 30만∼50만원에 팔 수 있었다. 벼 고추 마늘 들깨 등은 먹을 만큼만 조금씩 재배했다.

일터를 갑자기 잃어버린 주민들은 끝도 없이 이어진 자원봉사 행렬을 보며 조금씩 희망을 갖게 됐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몰려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기름을 닦아내는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교계에선 사고 이후 25개 기독교 교단, 1만여 교회의 그리스도인 70만여명이 방제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집계했다.

이제 바다는 거의 원래대로 돌아왔다. 은혜로운 것은 자연환경이 회복됐을 뿐 아니라 평소 교회를 멀리 하던 주민들이 하나 둘 교회에 나오게 됐다는 점이다. 특히 자원봉사본부 역할을 한 의항교회의 이광희(59) 목사 부부와 교인들이 하루에 수천명씩 찾아오는 자원봉사자들에게 방제장비를 나눠주고 간식과 식사를 챙겨주는 모습에 크게 감동받았다고 한다. 한 주민은 “교회가 정말 큰일을 하는 데고 신앙인은 대단한 사람이라는 좋은 이미지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주민의 절반에 가까운 120여명이 의항교회에 나온다. 장년 90여명, 유초등부 및 중고등부 30명이 주일예배를 드린다. 무속신앙이 뿌리를 내린 데다 김씨 이씨 문씨들의 집성촌으로 유교문화에 익숙한 어촌마을인 점을 감안하면 복음화율이 아주 높은 편이다. 이 목사는 “사고 이후 50여명이 교회에 새로 나왔는데 우리 교회 역사상 이만한 부흥이 없었다”며 “20년이 지나도 완전히 복구되지 못한다는 말까지 나왔지만 하나님께서 밀물과 썰물로 기름을 모두 닦아주시는 기적을 이뤄주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의항교회는 한국교회의 봉사정신을 기리는 상징이 됐다. 2011년 12월 5일 교회에 태안 기름피해 사료 전시관도 문을 열었다. 이곳에선 당시 피해 현황과 한국교회의 봉사활동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주민들의 상처가 완전히 아문 것은 아니다. 기름유출 사고로 굴 양식장이 철거돼 주민들은 큰 수입원을 잃었다. 사고 이전에 주민들은 6월 말부터 7월 25일 이전까지 굴 포자를 붙인 뒤 9월 초부터 이듬해 3월 말에서 4월 초까지 굴을 수확할 수 있었다. 굴 양식으로 1년에 3000만원 안팎의 수입을 올렸다. 피해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불만을 쏟아내는 주민도 적지 않았다.

낙지잡이를 하는 김재기(55) 안수집사는 “기름 사고 터지기 전에는 IMF가 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도시사람들처럼 돈벌이 걱정을 하는 어민이 많아졌다”며 “굴 양식 하던 사람들은 사업에 크게 실패한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곳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

태안반도 끄트머리에 있는 의항교회는 1974년 9월 창립됐다. 이 작은 시골교회가 환경 재앙에 맞선 복구센터 역할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런 거창한 명분 때문만은 아니다. 앞으로도 농어촌 교회의 명맥이 유지돼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다. 인적이 드문 시골에 나지막하게 솟아있는 십자가, 은은한 교회 종소리가 삶을 바꾸는 안내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문교(66) 장로가 그런 사례다. 마을 주변에 교회가 없었다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고등학생 시절 이 장로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져 불로 심판받는다”는 ‘무서운 얘기’를 듣고 믿음을 가져야 할지 한동안 망설였다.

“땡그랑 땡그랑.”

마을에서 6㎞쯤 떨어진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그의 귓전에 종소리가 울렸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온 마을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성탄절이었다. 이 장로는 모항교회 종탑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저기 교회가 있지…”라면서 집으로 돌아갔고 그 다음날 모항교회에 나갔다. 이 장로는 “성탄절에 교회에 처음 나가면 무슨 선물이나 받으러 간 줄 알 것 같아 다음날 교회에 나갔다”며 “때마침 부흥집회가 열린 날이었는데 목사님 말씀을 듣고 완전히 은혜를 받아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 장로가 개목마을에 교회를 세우는 데 힘을 쏟은 것도 자신이 처음 교회에 다니게 된 계기와 무관하지 않다. 마을에서 10㎞쯤 떨어져 있는 모항교회가 아니라 마을 안에 교회가 있다면 더 많은 주민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

이 장로를 포함해 모항교회에 다니던 교인들이 주축이 돼 의항교회를 세웠다. 주민들은 1년간 마을회관에서 멍석을 깔고 예배를 드리다 75년 9월 의항교회를 건축했다. 교회를 세우기까지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다. 낮에는 고기잡이를 하고 저녁에 곡괭이와 삽을 들고 교회 건축에 나섰던 성도들은 마을 무속인의 협박을 받기도 했다. 그 무속인의 아들은 “곡괭이로 땅을 자꾸 파니까 우리 어머니가 아파서 앓아누우셨다”며 교회 건축을 반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풍어를 기원한다며 연초에 바닷가나 야산에서 제사를 지내던 주민들이 많았다. 한 주민은 “교회 다닌다고 얼마나 핍박이 심했는지 모른다”며 “마을에서 예수를 믿을 거면 차라리 주먹을 믿으라는 험한 말을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김관수(62) 장로는 “핍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한 상황이었는데 불 같은 신앙심을 가진 주민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모래를 나르고 블록을 쌓아올려 세운 교회”라고 설명했다.

선교 비전을 품은 교회

의항교회는 95년 8월 430㎡(약 130평) 면적의 예배당을 새로 건축할 만큼 조금씩 성장했지만 성도는 40여명에 그쳤다. 교회를 달갑지 않게 바라보던 주민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은 교회가 마을 어르신들을 섬긴다는 인식이 퍼지면서부터다. 복음을 전하기 전 마을 어르신을 모시고 관광을 다니고 목욕도 시켜드렸다. 98년 10월 1일 부임한 이 목사는 “바깥 구경을 잘 못 하시는 어르신들을 위해 경로관광을 시작했는데 다녀와서 한두 분은 꼭 교회에 새로 나오신다”면서 웃음을 지었다.

지난달 23일에도 교회 어르신 40여명은 군산으로 벚꽃 구경을 다녀왔다. 박정례(85·여) 권사는 “굴이나 조개를 까서 8남매를 키우고 먹고사느라 힘들었는데 이제는 교회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편안하게 하늘나라로 떠날 준비를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또 여전도회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마을회관에서 어르신들에게 점심을 대접한다. 이 목사는 어르신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건강 강좌, 음악교실 등도 열 수 있는 노인대학을 만드는 비전도 세웠다. 어르신을 위한 선한 활동을 하는 교회로 알려지면서 이장, 어촌계장, 부녀회장을 비롯한 ‘마을 핵심 멤버’들이 교회에 나오는 열매를 맺기도 했다.

의항교회는 2000년부터 중국 코스타리카 필리핀 등에 파송된 한국 선교사 6명에게 매달 10만원씩 지원하고 있다. 미자립 개척교회 2곳도 매달 10만원씩 돕는다. 이 목사는 “처음에는 재정이 넉넉지 않은 어촌교회가 외국에 나간 선교사나 다른 교회를 지원하는 일에 반대했지만 우리보다 더 어려운 선교지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뒤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만선리의 시골교회에 다니던 초등학교 4학년 때 이 목사는 “담임전도사님이 형편이 어려우셔서 그랬는지 다른 곳으로 떠나시게 됐다”면서 울며 기도하는 어머니에게 “내가 커서 목사님이 될 게요”라고 약속했다. 서원한 대로 그는 칼빈신학교를 나와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89년 졸업했고 시골교회 목회자가 됐다.

“조용히 끊임없이 마을 분들을 위한 목회를 하는 게 목표입니다. 가장 큰 비전은 주민 300여명이 모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주민들과 하나로 어울려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주님의 뜻을 하나씩 이뤄가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니다.”

태안=김경택 기자 ptyx@kmib.co.kr

▶의항교회 가는 길

서울에서 자동차로 3시간 정도 걸린다.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해 서산IC까지 간다. 서산·당진·태안(만리포) 방면으로 좌회전해 450m를 가다 갈산리(서산)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운산교차로에서 서산(태안) 방면으로 좌회전해 32번 국도, 29번 국도를 타고 13㎞를 이동한다.

이어 예천사거리에서 32번 국도 안면도(태안) 방면으로 좌회전해 30㎞를 가다 송현삼거리에서 개목항·백리포해수욕장·의항리해수욕장 방면으로 우회전해 3.8㎞를 이동한다. 만리저수지 앞에서 개목항·의항해수욕장·구룡포해수욕장 방면으로 좌회전해 가다 보면 교회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