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흥우] 복불복 정년연장
입력 2013-05-03 18:38
K는 지난해까지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올 초 신년 모임에서 만난 K는 백수가 되어 있었다. 이제 겨우 50대 초반. K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으나 얼굴에 드리운 수심을 감추진 못했다.
“아니, 마누라하고 애들은 어떡하라고 그 좋은 직장을 때려쳐.” 직장이라곤 다녀본 적 없는 자영업자 L이 K의 부아를 돋운다. “내가 그만두고 싶어 그만뒀냐. 나가라고 옆구리 팍팍 찌르니 어쩔 수 없이 나온 거지.” K가 울분을 토한다.
K는 임원이 아니었다. 임원으로 승진하지 못해 20년 넘게 충성한 직장을 나왔다. 누가 묻는다. “그 회사는 정년도 없냐.” 정년 없는 회사는 없다. 정년은 있지만 실상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정년인 까닭이다. 40대에 임원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반강제적으로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는 구조, ‘사오정’(45세 정년)은 그렇게 우리 사회에서 양산됐다.
‘고용상 연령차별 및 고령자 고용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지난달 말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의 통과로 근로자 정년이 60세 이상으로 의무화됐다. 민간인도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정년을 법으로 보장받게 된 것이다. 공무원 정년은 과거 직급에 따라 차별을 뒀으나 2008년 법 개정으로 직급에 관계없이 60세로 일원화됐다. 물론 정년이 60세 이상인 직군(교수와 교사의 정년은 각각 65세와 62세)도 있지만 비로소 민간인과 공무원의 정년 평등이 이뤄졌다.
공무원이 결혼 선호도 조사에서 줄곧 상위권을 유지하는 이유는 직업의 안정성이 가장 크다. 범죄나 비리에 연루되지 않는 한 정년까지 잘릴 염려가 없다. 수많은 청춘들이 노량진 학원가에서 숙식하며 각종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는 까닭이다. 공무원 정년 보장이 ‘철밥통’이란 부정적 의미로 각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근본 취지는 상사의 간섭에서 벗어나 국민의 심부름꾼으로서 양심에 따라 소신껏 업무에 임하라는 뜻에서 정년을 법으로 보장한 것이다. 이제 민간 기업 직장인도 정년을 노사 합의가 아닌 법으로 보장받을 수 있게 됐다는 건 기업문화의 혁명적 변화라 할 만하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남자 77.2세, 여자 84.0세(2010년 기준)다. 10년 전에 비해 남자는 5.0세, 여자는 4.4세 늘었다. 평균수명은 의학의 발달과 생활여건 개선 등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정년을 더 연장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영국은 2011년 65세이던 정년을 아예 폐지했다. 65세 정년이 길다는 취지가 아니라 65세 이상이 돼도 고용에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현재 65세가 정년인 독일은 2029년까지 67세로 연장할 계획이다. 일본은 이미 1994년 정년을 60세로 법제화한 데 이어 지난달부터 희망자에 한해 65세까지 의무고용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정년이 사실상 65세로 늘었다.
정년 연장으로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게 됐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정년 연장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 또한 적지 않다. 정년 연장은 2016년 1월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 및 지방공사·지방공단 등에 우선 적용되고 이듬해 1월부터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와 300인 미만 사업장에 적용된다. 적용 기준이 다르다 보니 같은 해에 태어났더라도 정년이 연장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들의 박탈감을 보상해야 한다. 정년 연장이 시대적 추세라면 한 사람이라도 더 이 혜택을 누리게 해야 한다. 정부는 법 시행 전이라도 개별 기업체가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정년 연장이 복불복 게임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노사정이 지혜를 모을 때다.
이흥우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