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날’ 방엔 9·11테러 긴박감… 댈러스 남감리교대학 ‘부시 기념관’ 르포

입력 2013-05-02 18:48


1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근교의 남감리교대학(SMU). 벽돌과 대리석으로 된 새 건물에 중장년층이 아침부터 몰려들었다. 이날 일반인에게 처음 공개된 ‘조지 W 부시기념관(George W Bush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의 시작은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순탄’하고 밝아보였다. 최근 보스턴 테러 ‘덕’에 부시의 인기가 오르고 있는 것도 기념관에 대한 관심을 북돋은 것 같다.

한편으론 전직 대통령기념관에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는 한국의 서글픈 현실과 달리 며칠 전 전·현직 대통령들이 찾아와 박수를 쳐주는 장면에 부러움을 느끼며 전시관 문에 들어섰다. 먼저 야심차고 당당한 문구가 눈길을 끌어 잡았다.

‘대통령은 영예 이상의 것이며 관직(office) 이상의 것이다. 이것은 지켜야 할 약속이다. 이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던질 것이다.’ 2000년 12월 13일 부시가 제43대 대통령에 당선된 뒤 텍사스주에서 한 연설이다.

부시가 유소년 시절부터 모은 유명 야구선수들의 사인볼, 중학교 때 야구선수로 뛰는 사진도 보인다. 정치인 부시에만 익숙했던 기자에게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졌다. 그는 텍사스레인저스 구단주까지 한 야구광이다.

‘불의 날(A Day of Fire)’로 명명된 다음 방에서 분위기는 돌변했다. 2001년 9·11 테러 사망자 이름이 빼곡한 대리석이 한쪽을 가득 채웠다. 방 중간엔 세계무역센터 빌딩 폭파현장에서 가져온 녹슨 철골구조물이 흉물처럼 서 있었다.

대형 화면은 9월 11일부터 날짜별로 대통령 부시의 대응을 긴박하게 보여준다. 관람객 대부분이 자리를 쉽게 뜨지 못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영상을 시청하거나 터치스크린을 두드리며 테러 당시 기록을 찾고 있었다.

에이즈 퇴치와 낙오학생방지법 제정, 사회보장 확대 노력 등 이라크전과 대테러 활동에 가려 간과되기 쉬운 부시의 치적에도 상당한 공간을 할애했다.

하지만 대통령기념관이 빠지기 쉬운 ‘함정’에 부시기념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2005년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관련 전시물 어디에도 부시의 ‘반성문’은 볼 수 없었다. 날짜별로 부시의 행정지시와 성명들만이 나열돼 부시의 책임을 놓고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기 어려웠다. 이라크 공격 빌미가 된 대량살상무기(WMD) 존재를 둘러싼 논란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각시키지도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 다른 볼거리는 관람객 참여를 유도하는 최첨단 양방향 정보기술(IT)이었다. 최대 24명이 참여할 수 있는 ‘결정의 순간’ 방에서 관람객들은 ‘최고 국정 결정자’의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라크 공격, 카트리나, 금융위기 등 4개의 상황 중 하나를 택한 뒤 백악관 참모, 의원, 군 장성 등 조언자들의 의견을 참고해 4분 안에 3∼4개의 대안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

플로리다주에서 온 스티브 크레이머는 “9·11 테러 전시관이 가장 인상깊었다”면서 “부시는 열정과 애국심이 강한 훌륭한 대통령이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기념관이 자리잡은 남감리교대학 2년생 카일은 “부시가 주도한 이라크전은 비효율적이었다고 생각한다”며 “부시기념관을 관람하더라도 의견이 달라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 여학생은 “부시 대통령의 공과에 관심이 없다”고 전제한 뒤 “다만 부시기념관 개관으로 우리 대학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댈러스(텍사스주)=글·사진 배병우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