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황태순] 박근혜와 키신저

입력 2013-05-02 18:57


모레 박근혜 대통령이 4박6일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한다. 6월 초에는 중국도 방문할 예정이다. 본격적으로 4강 외교에 나서는 것이다.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하는 순간이지만 박 대통령의 마음은 결코 편치 않을 것이다. 남북 간 긴장은 최고조이고, 개성공단은 언제쯤이나 정상화될지 오리무중이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미국 방문을 통해 후보 시절부터 준비해 온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서울 프로세스)의 일단을 선보일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지도부와의 만남을 거치면 서울 프로세스의 모습은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박 대통령은 남북 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주변 4강과 함께하는 ‘서울 프로세스’의 투 트랙으로 평화공존과 공동 번영을 구상하고 있는 것 같다.

올해는 정전(停戰) 60주년이 되는 해다. 남과 북 그리고 미국과 중국은 3년간 처절하게 전쟁을 치렀고 그 후유증은 엄청났다. 그나마 미국과 중국, 우리나라와 중국은 우여곡절 끝에 국교를 정상화했다. 하지만 미국과 북한은 여전히 대결상태이고, 남과 북은 적대적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채 60년이 지났다. 무엇인가 근본적인 변화의 동력을 만들어야 할 시점이다.

미국은 구소련 붕괴 후 20년간 유지해 오던 세계 유일 슈퍼파워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엄청난 군비를 쏟아부은 후과다. 천문학적인 재정적자는 미국의 운신을 더욱 어렵게 한다. 욱일승천 굴기하는 중국의 팽창을 막아내는 것이 힘에 겨워 보인다. 그렇다고 중국에 패권의 일부를 나눌 생각은 없는 듯하다.

중국의 생각은 다르다.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이미 그 효용성을 잃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국력에 걸맞은 21세기 새로운 질서 확립이 필요하다고 본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전형적인 충돌이 다시 한번 벌어질 수 있다. 100여년 전 중국-러시아의 대륙세력과 일본-미국의 해양세력이 그 접점인 한반도에서 그랬듯이.

미국은 대외정책 기조를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로 전환 중이다. 태평양에서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지키기 위해 중국의 견제가 필수불가결하다는 판단에서다. 그를 위해서는 일본의 극우화와 엔저의 양적 팽창도 못 본 척한다. 우리에게는 미사일 방어체제(MD) 편입을 집요하게 요구하면서 ‘미-일-한’ 3각 동맹을 강화하려고 한다.

중국은 미국의 방어선을 뚫기 위해 3각 동맹을 교란시키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가장 취약해 보이는 남한을 분리시키고 최소한 중립을 지키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은 이를 위해 북한 카드를 활용하고 있다. 북한이 예뻐서가 아니라 남한을 미국으로부터 떼놓기 위해서다.

지금 한반도에서는 거시적으로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다툼이, 미시적으로는 남북한 간의 기 싸움이 다층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서로 물고 물리는 다원 방정식을 풀기 위해서는 단순한 군사적·전술적 차원을 넘어서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최근 방한했던 미 하원 아·태소위 에니 팔레오마베가 의원이 박 대통령에게 키신저와 같은 외교력을 주문했던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세계질서 재편 과정에서 어떤 스탠스를 취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명운이 갈린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1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은 주변 4대 강국에는 웃기는 이야기로 치부됐다. 하지만 지금은 다를 수 있다. ‘균형자’까지는 몰라도 ‘동북아 조정자’ 역할은 충분히 해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동북아에서 중국의 역할을 인정하라고 설득해야 한다. 중국에는 지역의 패권을 인정받으려면 책임 있는 역할과 처신을 주문해야 한다. 미·중 양국에 남북의 문제를 자기들 패권다툼의 지렛대로도 핑계로도 쓰지 말 것을 요구해야 한다. 박 대통령에게 역사를 꿰뚫는 혜안과 담대함이 필요한 시점이다.

황태순(정치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