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조용래] 日 역사왜곡의 뿌리

입력 2013-05-02 18:56

1990년 11월 7일자 일본의 석간과 8일자 조간신문, 그리고 TV방송은 한 가지 뉴스로 열도를 뜨겁게 달궜다. 89년 1월 죽은 히로히토 천황(일왕보다 천황이 일본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의 독백록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일본에 체류 중이었는데 이유는 고사하고 평소와 달리 호들갑을 떠는 일본 미디어들의 반응이 퍽 인상적이었다.

그해 ‘문예춘추’ 12월호에서는 ‘히로히토 천황 독백록’이란 이름을 붙여 전문을 실었다. 독백록은 46년 3월∼4월 초 히로히토가 가신 5명과 더불어 1930년 만주사변부터 45년 패전까지에 대한 정황을 술회하고 있다.

문예춘추 91년 1월호는 독백록과 관련해 지상논쟁을 벌였는데 ‘도쿄전범재판 대책의 일환’이란 주장과 ‘단순한 회고록’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맞섰다. 이후 독백록의 영문판이 공개되면서 전자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회고록을 영어로 번역할 정도라면 처음부터 의도적인 것으로 풀이됐기 때문이다.

도쿄전범재판 기소가 시작된 것은 46년 4월 29일이고, 독백록이 쓰인 것은 바로 그 직전이었다. 요시다 유타카(吉田裕) 일본 히토쓰바시대 교수는 독백록 작성 동기와 천황의 전범지명 문제가 관련성이 높다고 주장한다(‘쇼와천황의 종전사’, 1992).

패전 이전부터 연합국들 안에서는 천황 처벌 여론이 거셌다. 이제 구체적으로 전범재판이 눈앞인지라 천황과 그 측근들로서는 천황이 전쟁과 무관함을 어떻게든 밝혀야 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독백록을 마련, 번역본을 연합국에 제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백록의 핵심은 ‘개전은 어쩔 수 없이 했지만 종전은 성단(聖斷)을 내려 자신이 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입헌국의 군주로서 정부와 통수부의 일치된 의견(개전 결정)은 인정해야만 했다. 만약 인정하지 않았다면 도조(東條, 개전 당시 총리)는 사직하고 대대적인 쿠데타가 일어나(미국에 굴종하는 것으로 비춰지기 때문) 개전 주장은 더욱 거세졌을 것이다.”

전전 천황은 각의 결정 전 관계자를 따로 불러 내주(內奏)와 하문(下問)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는 통치방식을 썼음을 감안하면 위의 독백은 각의 형식만을 내세워 거짓을 주장하는 꼴이다. 천황이 전범대상에서 제외됨으로써 일본의 전쟁책임은 사실상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요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침략을 부인하는 주장을 펴 국제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데 그 뿌리는 바로 히로히토에게 있었던 셈이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