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한민수] 아…, 국정원

입력 2013-05-01 19:55


1999년 봄 평양.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집무실에서 한창 열풍이 불고 있던 남한 첩보영화 ‘쉬리’를 보고 있다. 영화광이었던 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남조선 안기부 아XX들, 별걸 다 영화로 만들고 그러는 구먼.” 이 얘기를 작은 상자기사로 보도했다. 며칠 뒤 국가정보원 대공부서 박○○ 팀장이 휴대전화로 연락이 왔다. 조사할 게 있다고. 약간 겁이 나 그를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1층 휴게실에서 만났다.

박 팀장(나중에 확인해 보니 가명이었다)은 기사에 나온 ‘대북 소식통’이 누구냐고 집요하게 캐물었다. 언론인의 직업윤리상 안 된다고 버티자 그는 마지막으로 “우리 회사인가요?”라고 떠봤고, “포괄적으로 정부 사람입니다”라고 대꾸했다.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은 그에게 “왜 그걸 그리 알아야 되냐”고 되물었다. 당시 ‘쉬리’의 필름 원판은 국내에 수량이 한정돼 있다고 했다. 그런데 김정일이 안방에서 볼 정도면 북으로 통하는 모종의 루트가 국내에 있을 수 있고 그걸 추적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아, 정보기관 사람들이 이래서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과 그가 애국심으로 무장돼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박 팀장에게 미안했지만 솔직히 그 기사의 소스는 국정원 고위 간부다. 김 위원장은 2000년 8월 남측 언론사 사장단을 만난 자리에서 ‘쉬리’를 본 사실을 털어놓으며 뒤늦게 기사를 확인해 주기도 했다.

또 세간의 조롱거리가 되다니

서울 내곡동 국정원 ‘호국탑’에는 순직자를 기리는 ‘추모의 별’ 50개가 있다. 직원 중에는 외부로 공개하지 못하는 사연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이 적지 않다. 해외에서 근무하는 직원은 ‘블랙’과 ‘화이트’로 나뉘는데 백색은 외교관 신분이어서 ‘사고’가 생기면 국가가 나서 뒤처리를 할 수 있지만 흑색은 다르다. 과거 한 국정원 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중동 국가에 유학생 신분으로 위장해 나가 있던 첩보원 A씨는 그 국가의 산업기밀에 접근했다가 체포됐다. 당연 우리 정부는 A를 모른다고 잡아뗐고, 해당 국가도 알면서 넘어갔다. 그는 결국 장기 복역한 뒤에 귀국해야 했다.

기자가 만난 국정원 직원 대다수는 순진할 정도로 ‘일’밖에 모른다. 어느 모로 보면 언론과 많이 닮았다. 기자들은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정보를 취재해 기사를 쓰는 반면, 그들은 국가의 안위를 위해 정보를 수집한다. 상사로부터 칭찬을 들으면 죽기 살기로 일에 매달리는 ‘습성’도 비슷하다. 사기를 먹고 사는 직업이라는 얘기다.

그런 국정원이 다시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이번에는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이다. 대선 개입 의혹으로 번지면서 전직 국정원장이 검찰에 또 소환됐고, 국정원 본부는 8년 만에 압수수색을 당했다. 우리나라처럼 국가정보기관이 자주 도마 위에 오른 경우는 전 세계에 없을 게다.

누구 탓인가. 수백 대(對) 1의 경쟁을 뚫고 들어가 1년간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나름 사명감을 갖춘 일선 직원들인가, 아니면 과거 집권세력과 이들에 부역한 고위 간부들인가. 국정원을 세간의 조롱거리로 만든 이들이 누구냐고 두 번 물어볼 필요도 없다.

정치적 독립기구로 만들어야

더 이상 국정원을 국내 정치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치열한 정보전쟁 속에서 그들의 경쟁자는 대통령의 반대자도, 야당도 아니다. 지금부터 국정원을 정치적 독립기구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자. 대통령은 독립선언을 하고 여야 정치권은 법과 제도로 뒷받침을 하자. 끝으로 일선 직원들이 반드시 수행해야 할 ‘중대 임무’가 있다. 앞으로 댓글을 달거나, 누구 뒤를 캐라는 등의 ‘이상한’ 지시가 내려오면 거부한 뒤 이렇게 말하라. “난 그냥 7급 공무원이 아니다. 정권이 아닌 국가를 위해 길러진 최정예 정보요원이다.”

한민수 정치부장 ms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