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고승욱] 봄바람

입력 2013-04-29 17:46

봄은 바람으로 느낀다. 화사했던 벚꽃이 산책로에 눈처럼 쌓여 초여름이 시작되는가 싶었는데 아직도 찬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든다. ‘봄바람은 기생(妓生) 철이다’라는 속담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그것도 잠시. 몸을 움츠리며 추위를 탓하다 보면 어느새 따뜻한 바람이 얼굴을 간질인다. 변덕스럽기가 봄바람만한 것이 없다.

봄이 막 시작할 때, 사람들은 매섭던 삭풍(朔風) 뒤에 찾아오는 바람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읽었다. ‘도처춘풍(到處春風·모든 곳에 봄바람이 분다)’은 일이 순조롭거나 좋은 일만 가득하다는 뜻이다. 비슷한 말로 ‘사면춘풍(四面春風)’이 있다. 누구에게나 모나지 않게 둥글둥글 대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득의춘풍(得意春風)’은 봄바람을 타고 소원을 이룬다는 말이다. 산과 들에 꽃을 피우는 3월의 바람을 옛 사람들은 은혜가 가득한 바람, 혜풍(惠風)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봄꽃이 떨어지고, 추웠던 겨울이 기억에서 가물가물할 때가 되면 느낌이 달라진다. 은혜롭기는커녕 귀찮을 때가 많다. 그래서 농사를 준비하는 청명부터 여름이 시작되는 입하 사이에 부는 4월 바람을 난풍(亂風)이라고 했다.

강하게 불었다, 약하게 불었다 좀처럼 세기를 가늠하기 힘들고 방향도 제멋대로다. 못자리에 뿌려놓은 볍씨가 바람에 날리자 농부들은 ‘입하 바람에 씨나락 몰린다’며 이 무렵 바람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난풍인 높새바람마저 불면 곳곳에서 산불이 났고, 사람들은 작물이 타들어가는 봄가뭄을 걱정했다.

어제 아침에도 여름철 태풍 같은 봄바람이 불었다. 동트기 전 창밖이 번쩍이고 천둥이 치면서 요란스럽게 비가 내리더니 출근길 돌풍에 우산을 제대로 들고 있기 힘들었다. 서울 하늘은 오후가 되면서 맑아졌지만 바람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이런 날씨는 다음달 초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유난히 요란했고, 변덕스러웠던 이번 봄의 대미를 장식하는 듯하다.

올해는 날씨만 유별난 게 아니다. 봄의 초입에 북한의 핵실험으로 시작된 한반도의 이상기류는 아직도 우리 머리 위에서 요동치고 있다. 6·25전쟁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자동차 지붕과 보닛 위에까지 보따리를 가득 싣고 철수하는 개성공단 근로자들을 보면서 부산으로 피난 가던 때가 생각났다고 했다. 희망을 전하는 초봄의 혜풍을 건너뛰고 어지러운 난풍만 몰아치는 형국이다. 계절의 여왕인 5월이 되면 북에서 불어오는 삭풍은 그만 멈출 수 있을까.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