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목자를 따르고 있는가
입력 2013-04-29 17:31
요한복음 10장 1∼10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과 우리 믿는 사람들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포도나무와 가지, 목자와 양이라는 도식을 통해 설명해 나갑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자신을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라고 소개합니다. 양들을 문으로 인도하는 목자라는 말입니다. 또 요한복음 10장 7절에서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 하고, 11절에서는 선한 목자라고 소개합니다.
이러한 비유적 가르침은 시편 23편의 노래를 떠올리게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2) 신약과 구약에 나타난 이 내용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공통점은 우리 성도들을 ‘양’이라고 규정짓고 있는 것입니다.
‘양은 언제 자리에 눕는가’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대개 양은 까다롭고 소심하여 보통 다음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자리에 눕지 않는다고 합니다. 첫째, 절대 안전하다고 생각해야만 합니다. 둘째, 양들 사이에 문제가 없어야 자리에 눕습니다. 셋째, 괴롭힘을 당하면 눕지 못합니다. 넷째, 배가 고프면 잠들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양은 목자와 같은 외부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로 표현되는 구약의 하나님이나, 신약의 예수님은 왜 우리들을 양으로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을까요. 먼저, 우리 교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를 양으로 표현하는 이면에는 우리의 생명과 장래를 책임지시겠다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목자이신 하나님의 양들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3절에서는 “음성을 듣고”라고 말합니다. 호주나 미국의 양치는 법은 뒤에서 몰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양치기는 앞에서 목자가 소리를 내면 그 뒤를 따라오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양들은 눈이 퇴화돼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앞에서 목소리든 악기의 소리든 어떤 소리를 내면서 이끌어 가야 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너희는 목자인 내 음성을 들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둘째, 3절에서 “각각 불러 인도하여”라고 합니다. 양들은 각각 다른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수컷과 암컷, 젊은 것과 늙은 것, 병든 것과 건강한 것들이 다 함께 있습니다. 또는 같은 부류라 하더라도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목자는 이 양들의 특성을 잘 압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인 우리를 각각 다 아십니다. 각각의 이름을 알고, 각각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각각 최선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나를 개인적으로 아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셋째, 4절에서는 “앞서 간다”고 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이끌어 가는데 항상 앞서 갑니다. 목자가 갈 수 없는 길로 양들을 몰아가지 않습니다. 먼저 가면서 그 뒤를 따라오도록 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도 앞서 행하시면서 우리의 길을 열어 가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불안이나 염려를 내려두고 앞서 가시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우리의 목자로 고백하며 따라가고 있습니까?
윤서구 성남 임마누엘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