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의승 (12) 기도로 소명 물었더니 “미자립교회를 도와라”

입력 2013-04-29 17:31


지난 시절 가장 보람 있는 일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농어촌 목회자들을 조금이나마 도운 것이다. 물론 내가 한 일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통로로 해서 행하신 일이다. 1993년 1월부터 100개 농어촌 미자립교회를 매달 지원해 왔다. 매달 한 번도 빠짐없이 마음과 물질, 기도로 그들을 섬겼다. 올해로 20주년이 됐다.

나는 이 땅의 큰 교회는 모두 농어촌의 작은 교회에 강한 부담의식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시 큰 교회의 모판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농어촌의 작은 교회들이다. 시골 작은 교회의 희생을 통해서 도시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경제 단위도 커지다보니 교회도 큰 기업과 같아지고 있다. 큰 교회에서는 익명성이 강하다. 목자가 양의 음성을 도저히 다 들을 수 없다. 나는 초대교회의 원형이 오늘날의 농어촌 작은 교회와 같다고 생각한다. 빌립보교회 등 성경 속 교회들은 몇 명의 신자들이 가정집에 모이면서 시작됐다. 사람들은 농어촌 작은 교회를 ‘미완성 교회’ 혹은 미래의 더 큰 교회를 위해 준비 중인 교회로 여기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작은 교회 자체가 바로 완성된 하나님의 교회다.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 나는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당시 처가가 춘천에 있어서 얼마 되지 않는 금액으로 몇 천평의 땅을 샀었다. 그래서 거기에 은퇴 목사님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 생각을 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살펴보니 병원이 멀었다. 병원이 있는 다른 곳에 부지를 마련하려 하니 돈이 너무 들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차에 잘 알고 지내던 감리교 선교부 총무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총무님은 “지금 한국 교회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미자립교회 문제입니다. 장로님이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미자립교회의 현황을 알려 달라”고 했다. 당시 전국 감리교 소속 교회 가운데 월 소득 30만원이 안 되는 교회가 1300개가 넘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수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 목회를 하는 줄 몰랐다. 거기에 내 사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92년 말 감리교 본부에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교회 100개를 선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교단 본부에서 100교회를 알려왔다. 1993년 1월부터 매달 지원을 시작했다. 금전적 지원뿐 아니라 각종 세미나도 열었다. 100개 교회 목회자 부부를 수안보파크호텔에 초청해 쉼을 갖게 했다. 곽선희 소망교회 원로 등 유명 목사님들의 강연도 듣게 해줬다.

나는 그들을 도우면서 미자립교회가 자립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했다. 물질로 그들을 돕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립이 중요했다. 당시 도움을 받던 미자립교회 목회자 가운데는 의식 있는 목사님들도 많았다. 그들은 자립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시했다. 심사를 벌여 프로젝트당 300만원씩 지원하며 자립을 유도했다.

나는 사업상 독일을 자주 다녔다. 독일과 우리나라를 비교하면 도시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시골로 가면 사정이 달라졌다. 독일과 한국의 농어촌 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독일은 도시와 시골의 삶의 질이 비슷하다. 대학들도 전국에 산재해 있고 마을마다 잔디구장이 깔려 있다. 시골에도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한국의 시골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리나라가 참다운 선진국이 되려면 농어촌에서 도시로 온 사람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자리를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리=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