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안현미] ‘사람은 삶을 풀어쓴 말’

입력 2013-04-28 18:41


시간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데려간다. 그러나 시간은 또한 우리가 싫어하는 모든 것, 모든 사람들도 데려간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가난해서 상업학교를 다녀야 했고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먹고살기 위해 돈벌러 다녀야 했던 어린 여자가, 그래서 삶을 서둘러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자학하던 어린 여자가 어느 날 세상은 누구에게나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의 충격 같은 것이었다.

내게는 기독교의 십계명처럼 내 인생의 3계명이 있다. 1. 저질러라 2. 닥치면 겪는다 3. 긍게 긍갑다(사투리로 내 경우에는 대긍

정의 의미). 첫 번째는 스님에게 얻었고, 두 번째는 스승에게 얻었고, 세 번째는 시인에게 얻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온 세상에서 혼자 상처받은 사람처럼 굴던 바보는 그러니까 결국 사람으로부터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구한 것이다. ‘삶’은 ‘사람’을 줄여 놓은 말이 아닐까, 라고 썼던 적이 있다. 오늘은 ‘사람’은 ‘삶’을 풀어쓴 말이 아닐까, 라고 써야겠다. 아직 오지 않은 삶,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을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고 써야겠다.

환절기. 시간은 봄 감기를 앓고 있는 내게서 감기가 아니라 봄을 데려가고 있는 중이지만 어느덧 ‘살며 사랑하며’ 원고 집필도 약속된 시간이 채워졌으니 일주일마다 되풀이되던 원고 마감의 두려움과 걱정도 데려갈 것이다(오늘이 마지막 마감일이다!). 그동안 지면을 허락해주신 국민일보에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끝끝내 삶은 죽음일 테지만 음악을 틀어 놓듯 시 한 편을 펼쳐둔다. 아직 오지 않은 삶,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실내악>

봄이 오는 쪽으로 빨래를 널어둔다

살림, 이라는 말을 풍선껌처럼 불어본다

옛날에 나는 까만 겨울이었지

산동네에서 살던,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던

실패하고 얼어죽기엔 충분한

그런 무서운 말들도 봄이 오는 쪽으로 널어둔다

음악이 흐른다 빨래가 마른다

옛날에 옛날에 나는 엄마를 쪽쪽 빨아먹었지

미모사 향기가 나던 연두, 라는 말을 아끼던

가볍고 환해지기엔 충분한

살림, 이라는 말을 빨고 빨고 또 빨아

봄이 오는 쪽으로 널어두던.

안현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