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3부)] 獨대입엔 ‘고교 서열화’ 없다

입력 2013-04-28 18:02


독일 대학에서 신입생을 선발하는 기준은 단 하나다.

대학입학자격시험으로 번역되는 아비투어(Abitur)다. 아비투어는 우리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역할을 하지만 그 내용은 수능과 질적으로 다르다. 수험생이 느끼는 부담도 훨씬 적다. 한국 입시제도와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고교와 대학의 서열화 불용, 공부할 수 있는 기회 균등 제공 등 교육이 지향하는 바를 시사해준다.

독일에서 대입을 위해 학생들이 치르는 시험은 4과목이다. 독일어 수학 외국어 중 2과목을 고르고 나머지 2과목은 학생이 선택한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과목을 골라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시험은 필기시험으로만 치르지 않는다. 교사 앞에서 구두로 대답하는 시험도 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경우 3과목은 필기시험으로, 1과목은 구두로 실시된다. 필기시험은 전부 논술형이다. 과목당 3∼4시간씩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시험은 하루에 끝나지 않는다. 필기시험은 짧으면 2주, 길면 4주간 치러진다. 구두시험까지 모두 끝나는 데는 평균 2개월이 걸린다.

아비투어에는 학교 내신 성적도 포함된다. 전체 비중을 따지면 4과목 시험의 만점이 300점, 학교 내신 만점이 600점이다. 둘을 합친 900점이 아비투어 성적의 만점이다. 내신 성적은 중등학교 11∼12학년(우리나라의 고2∼고3) 것이 반영된다. 내신 과목도 필수과목을 제외하고는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다. 즉 아비투어는 학교 내신과 논술이 합쳐진 형태다. 사고력 측정이 가능한 동시에 학생들이 학교 수업을 충실히 듣지 않으면 점수를 따기 어렵게 만든 것이다.

원칙적으로 전형 요소는 아비투어뿐이지만 일부 대학에서는 수험생의 건강 상태나 사회봉사경력 등을 고려한다. 경제 형편이 어려웠거나 가족을 간병해야 해 대학 지원이 늦어진 사정을 참작하기도 한다. 독일 빌레펠트대 학생 선발 담당 부처장인 올리버 드리스는 “경시대회 수상경력 등은 대학 입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입 스트레스는 없다=아비투어 시험은 16개 주 교육부가 각자 출제한다. 4과목 대신 5과목을 치르게 하는 주도 있다. 시험 채점은 학교 교사가 하고, 다른 교사가 한 차례 더 점검한다. 외부 기관에 채점을 맡기는 일은 없다.

주마다 시험이 다르므로 공부를 잘하는 주에서 최고 점수를 맞은 학생과 그렇지 않은 주에서 최고 점수를 맞은 학생의 실제 학업 능력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독일 대학들은 그 차이를 중시하지 않는다. 가중치를 두기 시작하면 지역간, 고교간 서열화가 일어난다. 독일인의 정서에 어긋나는 일이다.

대입 결과를 두고서도 공정성 논란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대학과 교육 당국, 교사에 대한 신뢰가 있어서다. 무엇보다 대학 입시를 ‘타인이 이득이면 나는 손해’인 제로섬 게임으로 보는 시각이 없다.

학생들은 11∼12학년 때는 그 이전 학년 때보다 공부를 열심히 한다. 하지만 아비투어 때문에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다. 본의 에른스트 모리츠 아른트 인문계 중등학교(김나지움) 한국어 교사인 김귀옥씨는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골라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선택과목은 자신이 희망하는 대학 전공에 맞춰 고르는 경우가 많다. 빌레펠트 체칠리안 김나지움 8학년생인 유학생 자녀 김세림(14)양은 아비투어 과목으로 라틴어와 화학 또는 물리를 선택할 생각이다. 외과의사가 꿈이기 때문이다. 라틴어는 의학 용어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된다.

◇재수는 없다=독일에서는 재수하는 수험생을 찾기 어렵다. 아비투어 성적이 확정되기 전 신청을 통해 재시험을 볼 수 있지만 성적이 확정된 뒤에는 시험을 다시 보기 어렵다. 다만 아비투어에서 탈락해 유급을 한 뒤 재시험을 치르는 경우는 있다. 이때는 학교를 1년 더 다녀야 한다.

대입에서 탈락해 이른바 대기학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두고 입학을 기다릴 때도 시험을 다시 치를 필요는 없다. 대기하는 기간에는 직업교육을 받거나 사회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

독일 대학에는 정원 제한이 없는 전공도 많다. 빌레펠트대의 경우 지난 학기 신입생 선발에서 학부 모든 전공(부전공 포함) 120개 가운데 70개 전공에서 정원이 없었다. 대학마다 선발하는 시기도 조금씩 달라 여러 대학에 지원이 가능하다.

특정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은 아비투어 성적이 없어도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공부하고 싶다면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셈이다. 단 한 가지 안 되는 일은 기부금을 내고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다. 드리스 부처장은 “기여 입학은 법으로 금지돼 있다. 독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늘어나는 대학생=이처럼 쉽게 대학에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독일의 대학진학률은 높지 않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 통계에 따르면 2000∼2007년 독일의 대학진학률은 30∼37%였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대학진학률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2011-2012년 겨울학기의 경우 대학진학률이 54%나 됐다. 프리드리히 에서 독일 연방직업교육연구소장은 유럽 통합이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유럽에는 대학 가는 게 최고라고 믿는 나라가 더 많다. 특히 유럽연합이 만들어진 뒤 앞으로는 고학력자 중심 사회가 될 것이라는 사고가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 정부가 고급 인력 확보를 위해 대학 교육에 지원을 확대한 것도 대학생이 늘고 있는 이유다. 독일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2007년 ‘대학협약 2020’을 맺은 뒤 대학 신입생 1명당 2만6000유로(약 3770만원)를 대학에 지원한다.

독일에서 대학 진학률은 앞으로도 50%를 유지할 전망이다. 독일 사회 일각에서는 일하는 손이 부족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본·빌레펠트=권기석 기자 keys@kmib.co.kr